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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4막 2장 - 2/2 본문

Don Carlo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4막 2장 - 2/2

neige 2015. 10. 4.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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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4막 2장 - 1/2



로드리고가 죽고 난 다음이라 흥미가 없어서 미룬 건 아니고 할 말이 많아서 미루다 보니 여기까지 미뤄졌음. 

레미즈 돌아오기 전에 이쪽 정리를 해두려고. 



펠리페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감옥에 몸소 찾아와 카를로에게 검을 돌려주며 화해를 청한다. 로드리고의 계획대로 펠리페는 로드리고를 반역자로 알고는 쓰라린 마음으로 처리해 버리고는 내가 우리 아들을 오해했구나 온 건데 앞에서 그렇게 로드리고를 예뻐했던 펠리페가 갑자기 휙 돌아서 대심문관이랑 손잡고 죽여버리기까지의 심리가 오페라에서는 모두 다, 전하께서 울고 계십니다-라는 부분까지도 생략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원작 안 보고 오페라만 본 경우에는 간혹 여기서 펠리페가 카를로 살리려고 로드리고 희생시켰다거나 하는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던데 그런 거 아니다. 로드리고의 편지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펠리페는 로드리고랑 카를로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아리아 하나 부를 정도의 시간만큼 고민 좀 하다가 로드리고를 택했을 거다. 4막 1장에서 대심문관과의 컨프롱으로 이미 보여줬듯이. 


로드리고는 펠리페가 네가 파는 약은 안 산다, 하지만 너! 너는 뭘로 살 수 있겠니? 했던 게 진심인 걸 알았던 만큼 자기 편지로 펠리페를 흔들 수 있다고, 그래서 왕이 혼란에 빠져 있는 틈을 타서 카를로를 플랑드르로 빼돌릴 수 있다고 믿고 계획을 세웠다. 펠리페의 신뢰와 애정을 이용한 이 부분이 로드리고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되겠지. 


로드리고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고 이제 카를로가 로드리고 말 잘 듣고 부왕이랑 거짓 화해한 다음에 말 타고 배 타고 재빨리 도망만 가면 다 되는 거였다. 카를로가 감옥에서 로드리고가 왜 날 버렸지, 엘리자베타랑도 안 되고 몰라 이젠 죽어버릴래 땅 파고 있을 동안 로드리고는 전 재산을 처분해서 카를로의 도피자금을 만들고, 엘리자베타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이미 그 전에 플랑드르 전체가 스페인에게서 독립할 계획을 세워서 술레이만에게까지-실제로는 술레이만 사후라 그 후계자였겠지만-원군을 얻어낼 계획까지 모두 , 나중에야 알게 된 알바 공작이 악마같다고 할 정도로 치밀하게 갖춰놓고 있었다. 카를로는 큰 일도 할 것 없이 플랑드르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 그게 로드리고가 바란 전부였는데- 







13잘츠에서 좋았던 게 카를로는 펠리페와 귀족들이 들어오는데도 감옥 안에 다른 사람이 왔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로드리고만 안고 있다가 펠리페가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놀라 고개를 든다. 원작의 지문을 살려주는 디테일인데, 카를로의 충격과 로드리고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이런 사소한 부분이 이제부터 터져나올 카를로의 만행에 개연성을 더해준다. 오페라 여주의 매드씬들도 볼 만하지만 남주의 매드씬을 모아놨을 때 카를로의 이 작태도 한 손에 꼽아줘야 할 광란의 장면이 아닐까.





카를로의 심정이야 앞에서 절절한 로드리고의 죽음을 보았으니 충분히 이입할만 하고, 이 시점부터는 펠리페에 이입해서 보면 더 좋다. 아니 사실 난 보면서 카를로보다는 펠리페에게 이입할 수 밖에 없어지더라.


처음으로 아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한 비밀까지 털어놓고 대심문관의 협박에도 못 내준다고 지켜줬는데 사실은 반역자였다는 걸 알고 슬픔과 분노를 못 이겨서 정식 심판도 처형도 없이 비겁하고 성급하게 죽여버렸다. 그리고는 내가 이 사악한 놈한테 속아서 아들을 오해했구나, 미워했던 아들을 기껏 용서해주고 화해하려고 먼저 손 내밀었는데, 그 아들이 죽은 사람의 아직 더운 피를 얼굴에 갖다 바르면서 신의 분노가 내릴 거라고 저주를 퍼붓는 거다. 황망하게 아들아- 불러보는데 이놈이 난 당신 아들 안 할거라고 이제는 부자지간 연까지 끊자고 난리다. 



 



원래도 멀쩡하지 않던 아들이지만 얘가 왜 이러나 영문을 몰라하는 살미넨펠리페 표정이 여기서 너무 마음 아픈 것이다. 카를로놈 그쯤에서 그만하고 빨리 플랑드르로 도망이나 갈 것이지ㅠㅠ 


카를로의 광태를 더는 참아줄 수 없어서 가려는 펠리페 앞을 막아선 카를로가 로드리고의 죽음의 진실, 로드리고는 사실 카를로 자신을 위해서 죽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사람이었다는 걸 밝혀버리는데 그만해 펠리페의 멘탈은 이미 한계야ㅠㅠ 노인공격도 정도껏 해라ㅠㅠ


이 순간까지 펠리페는 적어도 로드리고를 죽여버린 걸로 자기가 당한 배신을 갚아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펠리페가 울면서 로드리고를 죽이기는 했어도 그건 로드리고 말대로 복수였다. 자신을 속인 괘씸한 죄인을 벌했다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다독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자기가 잠시나마 혹했던 인간이란 겨우 그 정도였다고-왕비를 향한 그릇된 사랑을 품고 교활하게 왕자와 왕을 속이고는 비겁하게 도망갈 계획을 세웠지만 허술하게도 그 계획을 왕에게 들키는 수준의 인간- 눈물 닦고 아픈 발등은 모른척 아들을 대신 끌어안으려고 했는데, 사실은 그건 복수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렇게 사랑하는 로드리고가 펠리페 손을 끌어당겨서 자기 심장을 쏜 거였다는 걸 알았을 때, 더구나 그 목적이 카를로, 그토록 미워하는 아들이 왕이 되게 하기 위한 것, 펠리페의 죽음을 조건으로 올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펠리페의 마음이 어땠겠나.






그 슬픔을 쏟아내는 카를로와 펠리페2세의 애도의 노래, 통칭 라크리모사.


이 부분은 초연 드레스 리허설 직후, 본공 직전에 베르디가 삭제했던 부분이다. 베르디는 이 부분을 삭제하고서 아무래도 아까웠는지 레퀴엠의 라크리모사에 가져다 썼고 그런 이유로 다른 아리아처럼 대사 첫 마디를 따서 부르기보다는 라크리모사라고 부르고 있다. 4막 버전에서는 거의 생략되고 5막 버전에서도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라크리모사가 생략되는 경우 이 부분은 누가 내게 이 사람을 돌려주겠는가-라는 펠리페의 노래 한 줄로 짧게 끝나고 바로 백성들의 봉기로 이어지는데 그럼 안 됨. 베르디가 이 부분을 뺀 이유는 막차 시간이라든가, 검열이라든가, 주인공 커플의 비중이라든가 등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실러의 원작에서 클라이막스는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순간을 위해 극이 달려왔고 극의 핵심과 주제가 여기 들어가 있는데 그걸 빼버리면 뭐가 남겠어. 그런 의미에서 13잘츠는 또 한 번 소중하다. 기존 영상이나 음반에서 라크리모사가 들어간 건 적은데 그걸 넣어준 것 만으로도 고마운데 거기 더해서 이렇게 잘 살려주다니.


펠리페 마음 찢어지니까 카를로놈 그만해라 욕만 하기에는 여기서부터 카우프만카를로가 정말이지 좋아서 와...그냥 잘 생겨서 주인공한 게 아니었구나 실감했다. 내 왕좌는 이 사람 곁에 있을겁니다-할 때 정말 폐부가 절절 끓어서 벌겋게 녹아내리는 카를로의 슬픔이 밀어닥치는데 1막에서 엘리자베타랑 달달한 시간 보낼 때보다 이쪽이 훨씬 좋은 게 아무래도 절망적인 순간을 위해 최적화 된 목소리.


카우프만카를로는 어둡고 애절한 목소리다 보니 로드리고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슬픔에 못 이겨 그 마음 아픈 소망을 버리고 왕을 저주하고, 다가올 왕위마저도 내던지고, 결국에는 로드리고의 희생까지도 무위로 만들어버리고는 로드리고에게 네 신념을 내게 달라고 애원하다가 아니 차라리 나도 따라가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처절함이 로드리고의 다정한 마지막에 걸맞게 절절해서 매우매우 좋다. 나를 네가 꿈꾸던 세상의 영웅으로 만들어 달라고 할 때는 이 오페라를 통틀어 가장 남자답고 가장 왕자답기까지 해서 아 이래서 로드리고가 카를로에게 목숨을 걸었구나 납득이 감. 하지만 그걸 플랑드르 도망가서 안 하고 펠리페 앞에서 부르고 있다는 걸로 로드리고가 꿈꾸면서 죽었던 황금시대는 안녕. 카를로가 그 꿈 밟고 재까지 뿌려버렸네.

 

살미넨펠리페도 진짜 좋은 게 목소리가 정말 노인이 정신이 혼미해져가면서 울음이 치받치는 느낌이라 펠리페에게 가장 자비없는 원작과 오페라의 성격이 제대로 드러난다. 살미넨펠리페 별로라는 평도 있었지만 이렇게 연민할 수 밖에 없는 펠리페라서 나는 좋았다. 푸를라네토펠리페가 명실공히 돈 카를로의 히로인ㅋ이라면 살미넨펠리페는 서브 맞는데 그래서 더 비참한 펠리페. 연출에 따라서 여기에서 펠리페가 죽은 로드리고의 손을 카를로와 마주(!) 잡는다거나, 카를로에게 돌려주려던 왕자의 검을 죽은 로드리고에게 내리거나 하는 경우도 있는데 13잘츠에서는 펠리페가 로드리고에게 손 끝 하나 대지 못한 채로 서성거리면서 애도와 후회를 쏟아낸다. 이쪽이 더 실러의 원작에 가까운데, 이 시점에서 펠리페는 그렇게 사랑했는데 자신을 배신하고 아들의 사람으로 죽은 로드리고에게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쪽이 좋아서 이 연출이 소중하다. 펠리페가 괴로워할수록 좋다는 말임. 








13잘츠 연출의 무서움이 어느 정도냐 하면 펠리페가 뒤늦게서야 그래, 나는 그를 사랑했다! 뼈아프게 고백할 때 로드리고를 쓰다듬던 카를로가 뭐? 이 사람은 내꺼야! 하는 식으로 왕을 돌아보면서 로드리고의 시신을 품에 끌어안는데 이게 엄청 좋아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냐 녹아내리면서 봤는데 정식 출시된 영상의 라크리모사는 유툽과는 다른 날 공연으로 이것보다 더해서 거기서는 심지어 이러하다.





카를로가 로드리고 끌어안고 쓰다듬으면서 울다가 펠리페가 다가오니까 펠리페 옷깃이라도 로드리고 스칠까봐 얼른 끌어안고 소스라치게 피하는 거ㅠㅠ 와 진짜 무슨 약을 드셨어요?ㅠㅠㅠㅠㅠㅠ 안 되겠어 도저히 카를로놈이라고 못 까겠음 ㅠㅠㅠㅠㅠㅠ 이걸 보는 펠리페 표정도 잡아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안 보이니까 그냥 상상만 해야지ㅠㅠㅠㅠㅠ 라크리모사는 진짜 정식 영상이 최고임. 카를로가 펠리페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맞서는 순간의 시선도 제대로 잡히고ㅠㅠㅠㅠㅠ 13잘츠 돈 카를로 4막 2장은 정말이지 그동안 음악적인 기교에 중점을 둔 형식적인 연기를 보여줄 뿐이라고 오페라에 대해 가져왔던 거부감을 날려줬을 뿐만 아니라 진작 못 봐서 죄송합니다 반성하게 해줬는데 고마워해야하는 건지 원망해야하는 건지 아직 모르겠다. 


연기의 디테일은 앙상블도 살아있어서 왕이 로드리고의 죽음의 진상을 알고 나는 그를 사랑했다-고백할 때, 왕을 따라온 신하들이 왕이 로드리고의 계획에 이중으로 당했다는 걸 알자 수군수군하다가 왕이 전에 없던 격한 감정을 드러내보이자 차마 왕 쪽을 바로 보지 못하는데 이것도 실러의 원작에 부합해서 좋았다. 96샤틀레 버전에서는 왕이 애도의 노래를 부르면서 왕자의 검을 로드리고에게 내리면 신하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는 뉘앙스로 표현됐는데, 이쪽도 궁중비극으로는 멋있지만 원작에서는 알바 공작 이하 신하들이 우리는 살아서 뭐하나! 왕은 저놈한테 얼마나 반했길래 저런 말씀을! 저놈이 대체 무슨 사악한 마법으로 왕을 홀렸나!!라는 반응이었기 때문에 13잘츠 쪽이 좋음.  






자네가 꿈꾸던 세상의 영웅으로 만들어달라고 되풀이하던 카를로는, 스스로 영웅이 되어 보이겠다고 다짐하지 못하고 로드리고에게 매달려서 네 마음의 불꽃을 내게 달라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 이미 싹수는 커녕 실뿌리 가닥도 쓸만한 게 없다는 게 느껴지는데 역시나 그러다 차라리 나도 무덤 속 자네 옆에 눕게 해달라고 무너져버린다. 이 순간-







세상의 절반을 지배하는 왕, 일곱 바다를 다스리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을 되살릴 권력은 없어서 무력하게 누가 좀 이 사람을 내게 되돌려다오 읊조리던 펠리페가 카를로의 바로 이 말에 반응해 둘을 돌아보는 게 정말정말 좋았다ㅠㅠ 희곡에서 펠리페는 카를로의 비통함마저도 저렇게 소중한 사람을 가졌었다니 걔네는 정말 사랑했구나 한탄하고 질투하는데 그런 심정을 짐작할 수 있는 살미넨의 이 아주 작은 표정변화가 또 심장에 몹시 해로움.







거기다 음악 자체가 진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걸 빼면 안 됨. 진짜 안 된다. 돈 카를로에서 라크리모사 빼지 말라고 누가 법으로 만들어줘야 함 전 세계 베르디 덕들 뭐함? 현대에 진정한 베르디 바리톤은 없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빨리 이거나 법으로 만들어 주세요ㅠㅠㅠㅠㅠㅠ 펠리페의 회한과 카를로의 고통 뒤에 깔리면서 일렁이는 신하들의 합창이 점점 슬픔이 목 메이게 아플만큼 꽉 차오르는 느낌이라 진짜 좋음. 가사는 저놈이 왕의 심장을 훔쳐갔네 우리도 가서 죽어버리자 이런 소린데 음이 이렇게 너무 아름다운건 뭐다ㅠㅠㅠㅠ 로드리고의 꿈도 희망도 이렇게 사라지고 카를로가 도망갈 기회도 사라지고 펠리페의 마음도 찢어질대로 찢어지고 스페인의 미래도 끝장나서 정말 전부 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점차점차 낮고 무거워지면서 어둡게 산 자와 죽은 자를 덮어누르는 것까지 라크리모사 정말 좋다ㅠㅠ 


이렇게 좋은데 베르디는 이걸 왜 초연 직전에 빼고 옵션으로만 남겨둔 거지ㅠㅠ 막차시간때문이겠지만 그럼 베일의 노래를 자르고서라도, 어차피 후세에는 거의 생략될 발레를 자르고서라도, 발레가 당시 오페라 유행상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면 카를로랑 엘리자베타의 이중창을 아무데서나 자르고서라도 이걸 필수로 넣었어야 함ㅠㅠ 오랫동안 망실된 줄 알았던 이 부분을 1970년대에 와서야 고명하신 베르디덕후께서 파리 오페라 도서관을 뒤지다 악보를 찾아내서 복원된 건데 진짜 이분 복받으셔야 함ㅠㅠ 올해 하늘로 가셨으니 지금쯤 천국에 드셔서 베르디옹이랑 신나게 덕토크하고 계시길ㅠㅠㅠㅠ 


돈 카를로는 워낙 여러번 고쳐졌고 그 중에는 4막 2장이 로드리고의 죽음으로 끝나는 버전도 있었는데 사실 이건 보는 이의 심장을 배려한 친절이 아니었나 싶다. 이 다음부터가 또 몹시 괴롭기 때문에. 이렇게 왕과 왕자, 아버지와 아들, 사랑받지 못한 자와 사랑받은 자의 슬픔이 터져나오고서 카를로는 로드리고의 시신 위에 엎드려서 더 이상 아무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데 펠리페는 아직 애도를 끝내지 못 했다.


에볼리가 카를로를 구하기 위해서 마드리드의 백성들을 부추겨서 백성들이 카를로 내놓으라고 무사한 거 확인 못하면 안 물러난다고 하는 상황. 앞에서 에볼리가 카를로를 구하겠다고 했던 게 이 봉기를 부추길거라는 암시. 그런 사정을 알 수 없는 귀족들은 성난 백성들에게 당황하는데 펠리페는 오히려 문을 열어서 백성들을 들여보내라고 한다. 카를로처럼 온전하게 슬픔에 잠길 시간조차도 허락받지 못하는 펠리페가 이제부터 쏟아내는 진심이 또 카를로 못지 않게 제정신 아니라 좋음ㅠㅠ






여기서 펠리페가 문을 열라고 한 건 순전히 로드리고 때문이다. 펠리페는 철저하게, 그 슬픔과 분노까지도 로드리고의 도구로 이용당했다. 누구도 인정 못 한 펠리페의 인간적인 면을 보고 일깨워주고 인정해주었던 사람이, 그래서 반하고 믿었던 사람이 바로 그 약점을 찔러 피흘리고 쓰러지도록, 카를로가 그 위에 서도록 꾸미다니 펠리페 마음이 어떻겠나. 더구나 이미 돌같은 마음일 수 없는데. 


펠리페가 누가 그를 내게 돌려줄 것인가-거듭 읊조리는 건 그냥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라는 감정이 아니라 나를 속이고, 이용하고, 존경하지도 사랑하지 않고 죽어버린 로드리고에게 따져서 마음을 돌려놔야겠으니 살려내라는 것이다. 로드리고가 다시 살아난다해도 자신에게 마음 주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 펠리페가 쏟아내는 이 가련하고 무의미한 소망. 






       후작이 아직 살아있기만 하다면! 

그것을 위해 인도라도 내놓으련만. 위안없는 권력,

무덤 속으론 팔이 뻗치지도 않아서

인간 생명을 조금 서둘러 거두어들이면

그걸 고치지도 못하지!

죽은 자들은 일어서지 못한다. 내가 행복하다고 

누가 내게 말할 수 있느냐? 내게

존경심을 거부한 자가 무덤에 산다.

살아있는 자들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 한 정신이,

자유로운 인간 하나가 이 세기에

일어섰건만-그 한 명이 나를 경멸하고

죽었구나.


(...)


      난 그를 사랑했다. 몹시 사랑했어.

아들처럼 소중했는데. 그 젊은이에게서

새롭고 아름다운 아침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을 보존했는지 누가 알랴! 그는

내 첫사랑이었다. 유럽 전체여, 나를

저주하라! 유럽이 나를 저주해도 좋다.

그 사람에게서 나는 감사를 받을 만 했다.





진짜 눈물겹지 않음? 오페라와 희곡의 시점이 약간 다르지만 오페라에서 펠리페가 쏟아내는 말들, 그래 날 죽여서 내 시체를 밟고 내 옷을 벗겨내서 카를로에게 입혀 그놈을 왕으로 세워라, 카를로가 쏟아낸 저주만큼이나 미쳤다고 해야할 이 말은 그러니까 전부 진심임.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젊은 애 하나한테 배신 당했다고 그 충격으로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는 절대군주가 날 죽이라고 목 들이밀고 계심. 참담하지 않음? 






오죽하면 난리치던 백성들이 뭐야 왜 저래 몰라 무서워ㄷㄷㄷ 뒤로 물러나고 왕을 위해서 검을 뽑았던 레르마 백작과 다른 귀족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검을 도로 집어넣겠나. 혼자 처음으로 인간을 사랑했다가 속아서 차였다고 왕위도 목숨도 다 필요없다 울부짖는 이런 왕의 사랑이라니 너무 좋다ㅠㅠㅠㅠ 거기다 저 난리중에도 로드리고만 꼭 끌어안고 둘만의 세계에 벽을 치고 상관않는 카를로와의 대비도 정말이지 13잘츠의 연출은 훌륭함ㅠㅠ 까짓 3막 화형식이 영 꽝이면 뭐 어때 어차피 돈 카를로 핵심은 4막 2장임ㅠㅠ 다른 프로덕션에서 펠리페가 내 아들을 왕으로 세워라-하면 카를로가 나 불렀어? 하듯이 앞으로 나와서 백성들 보는 연출한 거 종종 있는데 어우 그거 진짜 좀 아님. 실러도 카를로는 이러고 있으라고 했단 말야.      


희곡에서는 이 시점에서 펠리페가 더는 슬픔과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버리는데, 그게 바로 로드리고가 바라던 기회였다. 그리고 기절했다가 깨어난 펠리페가 쏟아내는 대사들이 정말 아주 진짜 실러님 존잘님ㅠㅠㅠㅠ 앞에서 인용한 펠리페의 대사들이 전부 깨어난 펠리페가 넋나간 신하들 앞에서 토해내는 진심인데 그 절정은 이렇다.





       (일어선다) 하지만 예상이 빗나가고 만것이야. 다행스럽게도 내가 

아직 살아있으니까 말이야. 활을 당길 때면 난 아직도 

젊은이같은 힘을 느낄 수 있다. 그 녀석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고 말겠어. 그 녀석이 한 행동은 

그저 한 몽상가의 망상이었기때문에 

그 녀석이 바보처럼 죽게 된 것이라고 말이야. 

그 녀석의 몰락이 

바로 그 녀석의 친구를 짓누르고 

그리고 그 녀석이 숨 쉬었던 시대를 짓누르게 만들어버리겠어.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해야 해. 하룻밤 동안은 

이 세상은 아직 내 것이야. 오늘 밤을 이용하여 

내가 불지른 자리에는 앞으로 십수세대가 거치는 동안에 

단 한 알의 이단의 씨앗도 

열리지 않도록 해주겠다. 그 녀석은 

인류를 우상으로 삼고 나를 그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나는 인류가 그것을 보상하라고 요구하겠어.






삼족도 구족도 십족도 복수로는 약하다. 

왕의 복수라면 마땅히 전 인류를, 그것도 당대의 인류만이 아니라 십수세대의 인류를 상대로 해야지.


앞에서 왜 펠리페가 그렇게까지 완고하게 이미 저물어가는 가톨릭의 권위에 복종하고 이단 심판에 그토록 열중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실러는 그거 전부 로드리고한테 차여서 복수로 그런 거라고, 이 갈면서 대대손손 복수해주는 거라고 정리해주고 있는 거다. 아 진짜 너무 좋아ㅠㅠㅠ 내가 희곡의 펠리페한테 엎어진 게 바로 이 대사때문이었음ㅠㅠㅠㅠ 그냥 단순히 스케일이 크기만해서 좋은 게 아니라 로드리고가 가장 막고 싶었던 미래, 가장 지키고 싶었던 대상을 제대로 알고 남은 힘을 다해서 바로 그 싹을 태워버리려는 그 잔인한 유효함도 좋은 것이다. 바로 이 다음에 펠리페가 그럼 그가 가지고 놀던 인형부터 시작해볼까-하면서 다시 왕으로 돌아와서 카를로를 잡으려고 하는데 그 무시무시함이 오싹하게 좋아서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 아무래도 실러는 그렇게 좋아하라고 써주신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이렇게 좋은 부분을 베르디는 왜 안 써준걸까? 아버지와 아들이 남자 하나 두고 싸우는 치정극 느낌이 너무 나서 그런 걸까? 왜죠 왜 이 좋은 대사를 안 써먹고 버렸어요ㅠㅠ 진지하게 봐도 이 대사를 보면서 그럼에도 몇세대 후에는 결국 로드리고가 뿌린 씨앗에서 싹이 터서 인류는 자유를 자기 손에 쥐게 된다는 걸 생각할 수 있는 대사인데 그게 실러의 주제일텐데 왜죠ㅠ


로드리고의 계획과는 달리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희곡에서 펠리페가 충격으로 기절해주는 덕분에 카를로는 아무튼 아버지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로드리고의 우정에 감동한 레르마가 카를로를 내보내주는 걸로 마지막 기회가 생긴다. 오페라에서도 백성들과 귀족들의 반응을 보면, 펠리페가 정말 이 시점에서 무너지고 카를로가 왕의 자주빛 망토를 두를 수도 있었음. 있었는데-  







최종보스 등장. 

처음 봤을 때 대심문관이 말 몇마디로 모두를 굴복시키고 좀전까지 있었던 실낱같은 기회를 바로 불질러 없애버리는데 고분고분 무릎꿇는 백성들을 잡고 아 진짜 꿇지말라고 빌지말라고 탈탈 털고 싶었을만큼 답답했던 것이다...16세기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그래도...ㅠㅠ   





무너지려다가 대심문관 등장에 왕으로 돌아온 펠리페ㅠ 4막 1장에서 로드리고 내놔 vs 싫어 절대 못 줌!! 싸우던 걸 떠올리면 펠리페의 심리 이해가 쉬움. 새 사람 만나서 잘해보려고 간섭 자꾸 하는 옛 사람 차버리려다가 욕먹고 협박당했는데 새 사람한테 뒤통수 맞고 심장 뚫려서 차라리 날 죽여라하는 순간에 옛 사람이 찾아와서 해결해 준 거. 결국 왕은 앞으로도 쭉 제대에 머리숙일 수 밖에 없고 펠리페는 다시는 인간, 한 인간을 바랄 수 없게 되었음. 저 쓰고 신 표정이라니.     





그 현실을 인지하고 펠리페가 외치는 신께 영광-은 앞서 3막 2장의 화형식에서 이교도도 불태우고, 로드리고의 사랑도 확인하고 외치던 신께 영광-과 비교된다. 볼수록 살미넨펠리페 좋음 푸를라네토펠리페보다 일견 둔중해보이는데 그게 이제 인간이 되는 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왕관 아래 경직된 펠리페라서 그런 펠리페에게 얼마나 로드리고가 소중했을지 생각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ㅠㅠ 거기다 하필 상대가 역대급으로 카를로에게만 온 사랑을 다 바치는 로드리고라니ㅠㅠ    






그리고 여기까지도 오로지 로드리고에게만 매달려 있는 카를로를 보여주면서 막이 내리는 것도 실러가 보면 박수쳐주지 않았을까.


이렇게 중요하고 절절한 라크리모사를 베르디가 지운 것은 아무래도 가뜩이나 긴데 10분이나 더 길게 갈 수가 없어서 그런 게 큰 이유겠지만 극의 구조에서도 여기서 이렇게까지 로드리고의 죽음을 슬퍼하고 카를로와 펠리페가 절절하게 고백을 하고 후회를 하고 나면 이대로 막 내리고 집에 가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리는 것도 이유가 아닐까. 백성들의 소요 없이 로드리고의 죽음에서 바로 막이 끝나버리는 형태로까지 공연이 되었다니까 거기에 라크리모사를 얹으면 정말 엘리자베타와 카를로의 이별이 자리할 곳이 없어지겠지.


뒤집어 말하면 로드리고가 주인공으로 보일만큼이 아니면 라크리모사도 가뜩이나 긴 극을 더 길게 만들 뿐 공허하게 들릴 수 있는데 햄슨로드리고는 이만한 애도가 어울린다 싶게 좋아서 카를로의 가슴 에이는 슬픔에도 펠리페의 쓰디쓴 후회에도 더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맞음. 모로가도 결론은 햄슨로드리고 최고시다 그거지 ( 이젠 마구 뻔뻔함 ( 네? 뭐요? 베르디바리톤? 뭐라는지 안 들리는데요?


아니 그런데 이게 내가 눈 멀고 귀 막혀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13잘츠 연출이 대놓고 로드리고 밀어주고 있고, 그런 로드리고를 햄슨이 너무너무 잘 해서 그런 걸 어떡하겠음. 13잘츠가 펠리페->로드리고/카를로 밀어주고 있다는 증거가 한 가지 더 있단 말이지.  4막 2장을 시작하면서 줄거리 요약을 이렇게 했잖음.


감옥에 갇힌 카를로를 찾아온 로드리고가 죽고, 아들과 화해하러 온 펠리페에게 카를로는 로드리고의 진실을 밝히고, 충격에 빠진 펠리페와 카를로가 로드리고를 애도하고, 에볼리가 격동시킨 마드리드 백성들이 카를로의 처형을 막으러 감옥으로 밀어닥치고, 혼란의 와중에 에볼리가 카를로를 피신시키고, 로드리고에게 버림받은 충격에 펠리페가 무너지려는 순간 대심문관이 나타나 백성들을 무릎 꿇려 상황을 종료시킨다.


이제 막은 다 내렸는데 뭔가 빠지지 않았나? 로드리고 죽었고, 펠리페랑 카를로의 애도도 지나갔고, 마드리드 백성들도 밀어닥치고, 대심문관도 등장했고...맞음, 에볼리. 13잘츠의 4막 2장에는 에볼리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4막 2장은 주인공이 사망하는 만큼 이런저런 수정이 많았고 에볼리도 수정과정에서 들어갔다가 빠졌다 했는데 대개의 경우에는 에볼리를 빼지 않는다. 왜냐하면, 에볼리가 이 혼란의 와중에서 카를로를 도망시켜야 다음 5막에서 카를로가 감옥에서 탈출해서 수도원에서 엘리자베타를 만나는게 가능해지니까. 스토리의 개연성문제.


그런데 13잘츠에서는 에볼리가 카를로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덕분에 대체 저 많은 귀족과 대심문관과 정신차린 펠리페가 있는 감옥을 카를로는 어떻게 빠져나간 건가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데, 난 이 생략이 몹시 아주 몹시 좋다. 에볼리가 생략되면서 로드리고/카를로에게 최고로 집중하겠다는 연출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오페라의 에볼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서 카를로를 빼내는 능력때문이지만 사실 희곡을 읽고 보면 이 부분은 미묘한 것이, 원래 희곡에서 백성들을 움직이는 건 엘리자베타다. 그래서 엘리자베타가 더 군주감으로 적합하다고 하는 거. 능력이면 능력, 용기면 용기, 덕성이면 덕성, 모자라는 게 뭐란 말인가ㅠ남자운?ㅠ 오페라에 와서 에볼리 배역이 커지면서 그 공로도 에볼리 것으로 돌아갔는데, 프랑스어 버전에서는 에볼리가 엘리자베타에게 사랑하는 당신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서 엘리자베타와 카를로를 향한 사랑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흠 뭐 이정도 변형은...하고 넘어갔는데, 이탈리어판에서는 또 여기서 엘리자베타가 생략되고 달랑 에볼리만 등장해서 카를로를 데리고 도망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 이게 개연성은 부여해주는데 사실은 캐붕이다. 


13잘츠에서 카를로가 로드리고만 끌어안고 주위의 아무것에도 더는 신경 쓰지 않는 연출 잘 했다고 했는데 희곡을 보면 이 시점의 카를로의 마음이 바로 그렇게 온전히 로드리고에게만 가 있는 게 드러난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렇게 사랑한다고 내내 온갖 난리를 만들어 낸 바로 그 사람, 엘리자베타가 보낸 사람에게도 끄떡하지 않고 난 이제 로드리고에게만 마음을 줬다고 잘라내는 것. 카를로놈 진작 그럴 것이지ㅠㅠ 싶지만 그래 이제라도 그러니 죽은 로드리고도 흐뭇하겠네 싶은 이런 마음의 변화가 오페라에서 카를로가 에볼리 손에 이끌려가면서 무너지는 거다. 그렇게 사랑한 엘리자베타도 더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놈이 사랑한 적 없는 에볼리 손을 잡고 그렇게 사랑하는 로드리고를 두고 도망가는 게 말이 안 되잖아. 13잘츠에서 굳이 에볼리를 생략한 것도 아마도 개연성이냐 로드리고/카를로냐를 두고 저울질 하다가 로드리고/카를로를 택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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