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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5막 본문

Don Carlo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5막

neige 2016. 1. 5.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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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4막 2장 - 2/2



세 줄로 정리할 수 있는 5막


엘리자베타 Tu, che le vanità 좋음 하르테로스 완전 좋음

카를로놈 빨리 도망가지 않고 뭐하냐ㅠㅠ

그래 차라리 천국가서 행복해라ㅠ 


-끝-


이제 드디어 96 샤틀레 돈 카를로스로 넘어간다!!! 와 신난다!! 

햄슨 가발 얼마나 웃긴지 얘기할거야 알라냐 얼마나 작고 귀엽고 못되먹었는지도 프랑스어판 레스타테가 얼마나 좋은지도!!!








....그래도 명색 첫 돈 카를로에다가 입덕작인데 이렇게 끝내면 너무 서운하니까 좋았던 것들 조금만 더 얘기해보고 넘어가자.


먼저 하르테로스의 세상 허무함을 아시는 이여Tu, che le vanità


바리톤을 파고 있는 오페라 늅늅으로 상대적으로 소프라노는 잘 안 찾아 듣게 되는데, 그게 이성의 음역에 더 끌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사실 소프라노는 귀가 좀 힘든 경우가 많아서. 특히 레전설이신 옛분들의 레코딩은 진짜 힘들 때가 많음. 이건 좋은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면 나아질 문제겠지만 하르테로스 처음 듣고 신기했던 게 귀가 별로 안 힘들다는 거. 덕분에 비슷한 음색의 소프라노들을 찾아서 이쪽도 야금야금 듣는 걸 늘려가고 있음. 


하르테로스는 앞에서부터 쭉 의젓하고 품위있는 엘리자베타라서 좋았던 한편으로 그래서 마음 아팠는데, 과연 세상 허무함을 아시는 이여에서 옛 사랑을 기억하면서도 로드리고와의 약속을 지켜 카를로를 보내줘야하는 괴로움을 드러내는 부분이 너무 가련하지 않아서 좋았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제 오직 죽음의 평화뿐-하고 빌고 있는 이 왕비 역시도 아직 젊다는 걸 생각하면 카를로놈 진짜 여기저기 이게 무슨 짓이야 싶고 원망스러운데 이 카를로가 정신차린 척 로드리고와의 맹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또 아이고 저걸 두고 먼저 죽냐 로드리고 왜 그랬어ㅠ 


오페라에서는 생략된 로드리고와 엘리자베타의 약속이 13잘츠에서는 연출로 드러나는데 바로 이 장면. 






2막 1장 우정의 이중창에서 로드리고와 함께 기도하던 그 자리, 그 자세 그대로, 4막 2장에서 로드리고의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한 맹세가 엘리자베타가 로드리고의 자리에서 카를로를 감싸주면서 완성되는 것. 물론 완성되나마나 이미 틀렸지만. 어른스러운 하르테로스엘리자베타와 그 와중에도 사랑하는 그녀에게 믿음과 격려를 받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소년같은 카우프만카를로의 대비가 참 좋긴 좋음. 


사실 희곡에서는 이 부분이 굉장히 짧고 극적인데 베르디가....이별 장면을 너무 끄셔서 직전까지 아 로드리고/카를로구나 잘 보고 몰입해있다가 아 맞다 엘리자베타/카를로였지 잊었던 이 커플이 뒤늦게 생각나면서 아 빨리 헤어져 펠리페 온 단 말이야ㅠ 안타까움과 초조함을 주는 부분. 게다가 희곡에서는 단호하게 카를로가 엘리자베타를 품에 안고서도 보세요 저는 이제 당신의 아들일 뿐이고 아무런 다른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쳐내는데 오페라에서 이렇게까지 애틋하게 차마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들로 그려놔서 그건 좀...  하지만 음악은 좋음. 애써 씩씩하게 로드리고의 당부를 옮기다가 이제 안녕 영원히 안녕 영원히 영원히...끊어질듯 끊어지지 않고 손을 뻗는 게 들려서. 이런 거 듣고 있으면 확실히 베르디 진짜 심장 쥐락펴락 하는 걸 이렇게 잘 아시니까 당대부터 지금까지 사랑받으시는구나 싶긴함.


그리고 문제의 엔딩.


희곡에서는 카를5세의 유령이 궁 안을 배회한다는 괴담을 빌어서 유령으로 가장한 카를로가 왕비의 처소에 들러 이별 하다가 왕에게 잡히고 왕은 이 둘을 대심문관에게 넘기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게 싫었던 베르디는 카를5세의 무덤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죽은 황제가 카를로를 무덤속으로 데려간다는 것으로 결말을 바꿨는데 덕분에 이 부분은 연출이 저마다 달라져서 찾아보면 꽤 재미있다. 은둔생활을 하면서 생존해있던 진짜 카를 5세가 근위병의 칼에 찔려 죽은 카를로를 구하지 못하고 펠리페를 비난하는 눈으로 보는 현실적인 연출도 자주 있는데 솔직히 그건 좀 재미 없었고, 이 끔찍한 비속살해의 순간을 보다 못한 카를5세가 동상에 깃들어 망자들의 세계로 손자를 데려가는 듯한 13잘츠 연출이 초현실계에 속하는데 이거 난 좋았음. 특히 카를5세의 음성을 듣는 순간부터의 카를로의 표정이.


2막 1장에서 카를로가 조부의 음성을 처음 들었을때 보인 반응은 공포였다. 불가능한 사랑에 괴로워하면서도 아직 살아갈 수 있었던 시점의 카를로에게 죽은 자의 음성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때문에 그 팔에 안겼을때 무서움에 떨었던 것. 





하지만 세상에서 유일한 한 사람이었던 로드리고가 죽고 로드리고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던 그 이상은 온전히 자기 혼자의 어깨에 짐지워진 지금, 아버지와의 사이는 회복불가능하게 깨어졌고, 로드리고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서 사랑과도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상황. 이미 죽은 로드리고를 붙들고 네 신성한 불꽃으로 날 채워달라고 되풀이하던 카를로는 뒤집어 말하면 이제 완전히 텅 비어버린 상태. 애초에 이런 카를로가 로드리고의 소망을 이룰 수 있을거라고, 플랑드르를 구하고 스페인으로 구하고 엘리자베타의 말대로 영웅이 되어서 로드리고의 죽음을 기리게 될거라고는 카를로 자신도 믿지 못 했을걸. 엘리자베타가 모든 걸 떠나보내고 이제 죽음만을 빈다고 했지만 카를로도 마찬가지는 아니었을까. 그 기특하고 애틋하게 되풀이하는 맹세의 말은 사실은 다 실패한 자기최면일 뿐이고 차라리 무덤 속 네 곁에 나도 눕게 해달라는 그 애원이 가장 진심어린 말은 아니었을까. 간신히 도망가려던 시점에 들린 죽은 조부의 음성에 이제야 구원을 찾은 듯이 웃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 







카를로의 표정이 이제야 안식을 찾았다는 환희에 찬 표정이어서 이건 일종의 안락사가 아닌가 싶게 그려졌다. 로드리고의 그 노력과 당부가 무산되는 순간인데 카를로 표정이 이렇게 예뻐서 이대로 무덤속으로 끌려들어가 천국에 올랐대도 로드리고는 이 카를로한테 화도 못 내고 안아줬을 것 같지 뭔가. 


이 오컬트적인 결말이 좋은 건 극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신의 무력함때문이다. 모두가, 엘리자베타나 카를로는 물론이고 신권에 눌리는 왕권을 고통스러워하는 펠리페2세도, 자유를 위해 싸우는 로드리고조차도 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지만 정작 이 안에서 신이 뭔가를 이뤄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이 멀고 다리를 저는 아흔이 넘은 이단심문관이라는 한 인간이 신의 권위를 업고 그 권위로 왕국 전체를 지배하지만 그것이 과연 이들이 믿는 신의 뜻인가 하는 괴리감이 계속 생겨나는 가운데, 신의 이름으로 잔인하게 불태워지는 인간을 향해 신이 내릴 수 있는 은총이란 겨우 천국으로 올라와 그 영혼에 평화를 찾으라는 천상의 목소리뿐이라는 부분과 결말에서 카를로를 현실적으로 강하게 만들어주지도 못하고 고작 무덤 속 평화 안으로만 끌어안을 뿐이라는 허무함이 모두 통하는 부분이라서.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의 아들을 스스로 거둬가버려 손을 끊어버리는 점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극적인 부자관계의 반복이라 펠리페에게는 가장 비참한 벌이라는 느낌. 


오페라든 희곡이든 보고 있으면 아니 도대체 왜 로드리고같은 멀쩡하고 지각있는 사람이 카를로같은 것 때문에 희생되는건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데 햄슨 로드리고는 거기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을 줬다. 카를로를 사랑하니까. 로드리고가 이렇게 답을 준 것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더해서 세상에 오직 한 사람 로드리고 외에는 아무도 기댈 사람이 없는 한없이 연약한 카우프만 카를로는 왜 로드리고가 카를로를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구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답까지 주고 있다. 인터뷰에서 카를로는 일종의 희생자라고 말했던 게 그것. 물론 플랑드르 사람이나 엘리자베타나 펠리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게 어디서 희생자코스프레야 버럭 화가 날 수도 있긴 하지만 로드리고가 자유를 주고 싶고 구해주고 싶었던 대상이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돌아보자. 아버지이자 왕인 펠리페에게 억압받고 새어머니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에 이만큼 고통받는 카를로야말로 억압받는 불쌍한 인간이 아니었나. 적어도 카우프만 카를로는 그랬다. 그러니 이런 가련한 어린 양을 로드리고가 사랑하지 않는다는게 오히려 모순처럼 느껴진다. 혁명가가 구하려는 민중이 항상 현명하고 이성적이지는 않다는 걸 생각하면 더구나. 




아 진짜 5막은 다른 부분에 비해서 안 파고 안 듣고 안 봐서 할 말이 아 좋네요 이거 밖에 없는게 보여서 부끄럽고 웃프지만 아무튼 이렇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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