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
훈훈하지만 잘 몰라주는 오나라 남자... 본문
뭔가가 부지런히 올라온다는 건 지금 해야할 게 있는데 하기 싫다는 거죠....;;;
그렇기도 하고 이것도 꽤 오래 묵혀놓아서 올해가 지나기전에 처치해야 할 것같은 기분도 들고요
언제나 그렇듯 망상은 다섯, 추측은 셋, 고증은 둘입니다.
비록 군사님이 ㅂㅌ로 나오는 건 그렇다쳐도 조조한테 차이는데다가 근이 형님이 사람이 아닌 걸로 나왔다고 해도 창천항로를 싫어할 수 없는 건 다른 삼국지 매체라면 가볍게 생략해 줄 인물들마저도 그 짧은 특징을 잡아 등장시켜 준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창천항로를 고증이 훌륭해요라고 말할 수는 절대 없지만 아무튼 에너자이틱한 오나라를 그만치 그려준 삼국지물도 드물잖습니까. 여전히 군사님의 묘사에 대한 앙심이 깊고 무겁게 남아있지만 그래요, 인정할 건 인정합니다.
오나라가 누구 하나 뺄 것 없이 멋졌던-심지어 단칼에 삐해서 삐하고 수모를 당하고 마는 손교마저도- 관우 포획 작전에서도 그런 면이 드러나는데 장흠과 오찬, 주연에 낙통까지도 등장해주는 세심함. 특히 주연의 도련님컴플렉스를 반장을 통해서 은근 꽈준다거나 우아한 자세로 지시를 내리는 육손에게 역시 우아한 자세로 답하는 낙통이라거나 하는 부분은 그저 닥치고 큰절해야 할 부분인겁니다. 주연도 꽤 사연이 구구한 진성 도련님에 능력치 제법 좋은 사람이지만 특히 낙통이나 오찬은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들로 육손의 후반기를 함께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찬은 특히 육손을 파들어가려면 건너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군 오현 옆동네인 오정현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했음에도 명성으로는 육손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오정현에서 오현은 걸어가자면 걸어 갈 수 있는 옆동네라서 육손과 어려서부터 뭔가 접점이 있지 않을까하는 망상이 가능해집니다.
육손의 동생인 육모가 워낙 사람을 안 가리고 주워와서 거두는 걸 즐겼다고 하는 만큼, 옆동네에서 일감 구하러 온 조금 남다른 똑똑한 아이가 육씨 집안의 막내도련님 눈에 들었다거나 그래서 그 집안 세 도련님의 글동무가 되어 학문을 닦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임관한 시기를 보면 육손보다는 좀더 연상이 아닐까 싶으니만치 즐거운 구도가 되는거죠. 어린 도련님들과 형같은 글동무.
그건 어디까지나 망상이고 역사에서는 오찬은 차분차분 이름을 얻어서 손책의 어려운 시절을 함께 했던 손하孫河에게 발탁되어 오정현의 하급관리로 일하다가 손하가 장군이 된 이후에는 곡아현의 현승에서 장사로까지 승진이 됩니다. 요컨대 육손보다는 임관이 빨랐던거죠. 손책 시절부터 이미 일을 했으니까요. 손권도 형의 뒤를 잇고 난 후에 오찬을 주부로 삼고 다시 현령으로 보냈다가 참군교위의 직을 내립니다.
그리 상세하게 전적이 남아있지 않은, 그래서 오찬하면 그거 먹는건가요 소리나 듣는 이 사람의 일생 중 선명한 일화 하나는 222년, 손권이 조휴와 장료를 만나서 캐박살날 때의 일입니다. 조휴가 끌고온 군대에다가 폭풍까지 닥쳐서 여범이나 하제의 군사도 수천에 이르도록 물에 빠져 죽었는데요. 이때 작은 배는 다들 뒤집혀 가라앉았지만 큰 배는 그대로 버티고 있어 물에 빠진 자들이 큰 배에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큰배에 있는 사람들은 배가 뒤집힐까 두려워 창과 방패로 물에 빠진 같은 편을 쳐낼 뿐 받아들이지 않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오찬과 황연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옆에서는 배가 무거워져 가라앉을 것이라고 걱정하자 오찬은 "배가 가라앉는다면 마땅히 함께 죽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빠졌는데 어떻게 그들을 버리겠는가."하고 답했다고요.
짧은 이야기지만 그걸로 오찬이라는 사람의 됨됨이가 보인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그런 상황이면 매정하지만 사람을 구하지 않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을 거에요. 물에 빠진 목숨만 목숨은 아니고 배에 탄 사람들의 안전도 확보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죽게되면 다 죽더라도 눈앞의 사람은 구하겠다는 미욱하지만 따뜻한 인간성. 오찬은 그렇게 보입니다.
이때 손권에게 패배를 안긴 조휴는 훗날 육손의 계략에 빠져 석정에서 대패, 분노로 등창이 나 숨을 거두게 되는데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요. 조휴와의 싸움에서 돌아온 오찬은 회계태수로 승진하고, 숨은 지사들을 초빙하기도 하고 산월을 토벌하기도 합니다. 젊어서부터 현의 정무를 맡아 실무도 잘 알았을테고 유독 문관 무관 구별이 안가는 오나라 사람 답게 싸움에도 나가는 걸로 봐서는 군무에도 어지간한 실력이 있었겠구나 싶습니다. 산월토벌에 인구 늘리기라는 오나라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미션을 클리어하고 나서 오찬은 둔기교위와 소부를 거쳐 나중에는 태자태부로까지 승진합니다. 호족의 강세가 두드러졌던 오나라에서는 빈한한 출신의 그리고 뒤늦게 출사한 문관으로서 눈에 띄는 출세를 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찬 역시 이궁의 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오찬의 경우는 파벌 때문이라기 보다는 말그대로 옳고 그름의 분별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적서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 노왕을 밖으로 내보내 태자와의 구별을 둘 것을 고집해서 말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궁의 난은 사실 태자보다 노왕에게 손권의 마음이 쏠려 일어난 앙화였으니 이걸로도 그리 곱게 보일 수 없었을텐데, 결정적으로 오찬은 육손 때문에 손권의 노여움을 사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승상이었던 육손은 승상임에도 불구하고 무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오찬이 여러차례 육손에게 도읍의 상황을 전했다고 합니다. 육손은 오찬의 소식을 받고 손권에게 거듭 간언을 했고요. 결과는 아시는대로 육손은 삭탈관직에 20개조 죄목추궁. 그리고 오찬은 노왕과 양축의 참언을 받아 옥에 갇혔다가 처형되고 맙니다. 육손의 경우 홧병으로 죽지 않고 버텼다면 그렇게 쉽게 처형시키지는 못했을텐데, 아무리 그래도 태자태부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을 너무 쉽게 처형시켜 버린게 아닌가 싶은 감도 들만큼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그만큼 오찬이 육손과 가까웠다는 것, 그리고 오찬을 지켜줄만한 배경이 달리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찬이 죽고 난 뒤 육손도 결국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죠.
따져보아도 오찬은 이만한 파벌 싸움에 끼어들 실익도 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태자와 인척인 것도 아니고 가문의 흥망이 달린 것도 아니고요. 사세를 보는 눈이 있다면 육손과의 긴밀한 접촉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도 아주 짐작을 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양축이 워낙 손권을 구워삶아 정말 태자를 갈아치울 논의까지 일어나서, 태자가 육손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는 형국이었으니까요. 이기면 태자의 공신, 지면 차기 태자의 원수가 되는 선택. 그리고 손권의 마음이 갑작스럽게 변하고 육개의 복수심 섞인 거짓 고변이 있기 전까지는 태자는 정말 위태로웠으니까 선택을 했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어요. 현명한 사람이라면 거기서 패를 놓고 물러나는게 득보는 일일겁니다. 적절하게 거리를 유지해 살아남은 제갈각이나 그후로 아들까지 잘 살아남은 주연을 보면 매끄러운 처신으로 위기를 넘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계의 정당성을 고집하다가 육손을 엮기 위한 표적수사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오찬은, 어쩌면 222년 동구의 싸움에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하던 그 사람에서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옳고 그름은 분명하고, 영리한 정치적 술수는 몰라도 숨어있는 지사와 백성을 끌어낼 마음씀은 베풀 줄 아는 사람. 괜찮은 사람 아닌가요? 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육손에 대한 걸 쓰게되면 반드시 오찬주연낙통은 꼭꼭꼭 살려쓰리라 벼르고 있고요;
뭐 그리 대단한 전공을 세운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이 없다고 해서 삼국의 역사가 바뀔 것도 아니지만 간간히 갈피에서 보이는 이런 "사람"의 모습이 삼국지를 파고들게 되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건 오나라뿐만이 아니라 촉나라도, 그리고 아직 별로 안 파고 있지만 위나라도 마찬가지일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