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

시험에 나온 삼국지 본문

三國志

시험에 나온 삼국지

neige 2008. 12. 27. 01:10

전에 조선시대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이 수험서로 삼국지연의를 애독한다하여 이덕무가 탄식했다는 글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책문에 삼국지가 언급된 예는 1609년 광해군 1년에 시행된 증광문과인데요. 핵심 주제는 아니고 단편적인 사례중의 하나였습니다.

"소열제 유비는 무용이 뛰어났으나 셋으로 나뉜 세상의 하나를 가지는데 불과했다"

후세에 경계로 삼을 실패한 군주중의 일례로 언급되었는데요. 그밖에도 더 있겠지만 일단 손 닿는 곳에서 책꽂이에 꽂힌 <책문-시대의 물음에 답하라>에 나온 것은 이것뿐이네요. 문제의 요지는 임란이 일어난 뒤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갈것인지 말들을 좀 해봐가 될까요. 본문 뒤에 붙은 해설에 따르면 광해군 1년에 행해진 시험이기는 하나 문제에 왕위에 오른지 30여년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대책문의 대상이 선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합니다. 기대승에게 야단맞은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선조도 삼ㄷ의 징후가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책문...>의 저자가 고른 대책문에서는 유비가 실패한 이유를 사리판단이 명료하지 않아서 라고 답하고 있네요.


단 한번 출제로 연의는 과거수험생의 필독서가 될 리는 없으니 아마도 그 사이 다른 과거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은 가운데 그 후로 약 400년이 흐르고 난뒤에도 삼국지는 시험 문제로 등장했으니, 2002년 행 정 고 시 정 치 학 제2문으로 출제된 문제가 그것입니다.


"<삼국지>에는 유비와 조조라는 인물이 대비되고 있다. 유비는 명분과 신의에 따라 행동하고, 조조는 그보다는 정치, 군사적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정치에서 명분과 신의의 추구가 우선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익의 추구가 우선되어야 하는가? 정치의 본질에 대한 여러 시각을 원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시오."
 
음, 유비가 과연 명분과 신의에 따라 행동했는가에 대해 태클을 걸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논점일탈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겠지요^^;; 삼덕시험이 아닌 이상 포인트는 정치의 본질에 대한 정리와 기준 제시일테니까요. 자세한 해설은 아마도 2002년 8월 고시계에 실렸을 겁니다;;

그리고 5년 뒤 2007년에는 수능 지문에도 등장합니다. 삼국지연의나 진수의 삼국지는 아니고 판소리 적벽가였죠. 황개의 화계에 당해 정욱과 병사들을 이끌고 도망가는 조승상부분이었습니다.


(가)[중모리] 창황분주 도망을 갈 제 새만 푸루루루루 날아 나도 복병인가 의심하고, 낙엽만 퍼뜩 떨어져도 추병인가 의심하여, 엎어지고 자빠지며 오림산 험한 산을 반생반사 도망을 간다.

(나)[아니리]조조(曹操) 가다 목을 움쑥움쑥하니 정욱(程昱)이 여짜오되,
“승상님 무게 많은 중에, 말 허리에 목을 어찌 그리 움치시나이까?”
“야야, 화살이 귀에서 앵앵하며 칼날이 눈에서 번뜻번뜻 하는구나.”
“이제는 아무 것도 없사오니 목을 늘여 사면을 살펴보옵소서.”
“야야, 진정으로 조용하냐?”
조조가 목을 막 늘여 좌우 산천을 살펴보려 할 제, 의외에말 굽통 머리에서 메추리 표루루루 하고 날아 나니 조조 깜짝 놀라,
“아이고 정욱아, 내 목 떨어졌다. 목 있나 봐라.”
“눈치 밝소. 조그만한 메추리를 보고 놀랄진대 ㉠큰 장끼를 보았으면 기절할 뻔하였소그려.”
조조 속없이,
“야 그게 메추리냐? 그놈 비록 자그마한 놈이지만 냄비에다 물 붓고 갖은 양념 하여 보글보글 볶아 놓으면 술안주 몇 점 참 맛있느니라만.”
“입맛은 이 통에라도 안 변하였소그려.”
조조가 좌우 산천을 살펴보니,

(다)[중모리] 산천은 험준하고 수목은 총잡한데, 골짜기 눈 쌓이고 봉우리 바람 칠 제, 화초 목실 없었으니 앵무 원앙이 그쳤는데 새가 어이 울랴마는, 적벽 싸움에 죽은 군사 원조(怨鳥)라는 새가 되어 조 승상을 원망하여 지지거려 우더니라.나무 나무 끝끝트리 앉아 우는 각 새 소리. 도탄에 싸인 군사,고향 이별이 몇 해런고. 귀촉도 귀촉도 불여귀라, 슬피 우는 저 초혼조. 여산 군량이 소진하여 촌비 노략 한때로구나, 소텡 소텡 저 흉년새. 백만 군사를 자랑터니 금일 패전이 어인 일고, 입삐쭉 입삐쭉 저 삐쭉새. 자칭 영웅 간곳없고 도망할 길을 꾀로만 낸다, 꾀꼬리 수리루리루 저 꾀꼬리. 들판 대로를 마다하고 심산 숲 속에 고리각 까옥 저 까마귀. 가련타 주린 장졸 냉병인들 아니 들랴, 병에 좋다고 쑥국 쑥쑥국. (중략)
㉡처량하구나 각 새 소리. 조조가 듣더니 탄식한다.
“울지를 말아라. 너희가 모두 다 내 제장 죽은 원귀가 나를 원망하여서 우는구나.”

(라)[아니리] ㉢탄식하던 끝에 ‘히히히, 해해해’ 대소하니 정욱이 기가 막혀,
“여보시오 승상님, 근근도생 창황 중에 슬픈 신세 생각지 않고 무슨 일로 웃나이까?”
조조 대답하되,
“내 웃는 게 다름 아니라 주유(周瑜)*는 꾀가 없고 공명(孔明)*은 슬기 없음을 생각하여 웃노라.”

(마)[엇모리]이 말이 지듯 마듯 오림산곡 양편에서 고성 화광이 충천, 한 장수가 나온다. ㉣얼굴은 형산백옥 같고 눈은 소상강 물결이라. 이리 허리 곰의 팔, 녹포엄신 갑옷, 팔척 장창 비껴들고 당당위풍 일 포성, 큰 소리로 호령하되,
“네 이놈 조조야. 상산 명장 조자룡(趙子龍)을 아는다 모르는다? 조조는 닫지 말고 창 받으라!”
말 놓아 달려들어 동에 얼른 서를 쳐, 남에서 얼른 북을 쳐, 생문으로 내리닫아 사문에 와 번뜻! 장졸의 머리가 추풍낙엽이라. 예 와서 번뜻하면 저 가 뎅기령 베고, 저 와서 번뜻하면 예 와 뎅기령 베고, ㉤백송골이 꿩 차듯, 두꺼비 파리 차듯, 은장도 칼 베듯, 여름날 번개 치듯 흥행행 쳐들어갈 제, 피 흘러 강물 되고 주검이 여산이라.
- 「적벽가(赤壁歌)」 -

*주유: 조조의 위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오나라의 대장군.
*공명: 제갈량(諸葛亮). 위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촉나라의 군사(軍師).

일단 시험지를 받아드셨을 2007년도 위파 수험생분들께 심심한 위로를 늦었지만 전합니다. 그래도 조승상이 관우보고 가짜 곡소리 가르치는 장면이나 관우앞에 엎드려 비는 장면이 안나온게 어디에요^^;;

조승상 부분이니까 우리승상빠인 저는 흔들리지 않아요-라고 생각했지만 찾아보니 우리승상이 주석처리되어 계시는군요+ㅁ+ 2007년에 수능 안봐서 다행입니다. 모 시험을 보다가 우리 승상이 1번에 나오시는 바람에 가슴이 뛰었는데 1번을 틀렸던 아픈 기억이 있거든요. 아, 그러고보니 다른 과목에서도 승상이 등장했는데 그것도 틀렸어요. 둘다 실전은 아니었지만 그리 기분 좋지는 않죠-_-;;;

수능 지문으로 나와서가 아니라 적벽가는 적벽가 자체로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전 군사님 동남풍 빌고 도망가는 대목과 자룡 활 쏘는 부분을 제일 좋아하지만 보통 적벽가만의 특색으로 꼽는 건 병사설움대목과 새타령 대목이죠. 그래서 이 지문을 두고서도 새타령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었네요.

병사설움대목은 듣고 있으면 웃을 수가 없어서 잘 듣지는 않습니다. 사연은 전쟁터라면 있을법한 그런 사연들이에요. 혼인 첫날밤도 채 치르지 못하고 끌려나온 새신랑, 늦게 본 자식이 이제야 쥐엄쥐엄 재롱을 부리는데 그 모습이 눈에 선한 아버지, 문지방에 기대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아들. "위국 병사들가 적벽강으로 싸움가자"하는 소리에 우르르 끌려나와 일전을 앞에 두고 고향생각 부모생각에 우는 군사들. 단순히 삼국지 3대대전의 하나 같은 수식어로는 담을 수 없는 진짜 전쟁이 주는 것들을 보여주는 느낌이라 마음이 편하지 않거든요. 그렇게 설움에 겨워 울음을 우는 군사들을 다그치면서 나라에 충성하고 공을 세우고 운운하는 삼국지 무장다운 군사가 나와 호령을 하지만 그 군사들의 아내와 아이와 부모가 어떤 소식을 듣게될지 아는데 그 대목을 되풀이해서 들을 기분이 나지가 않는 것도 당연할겁니다;    

그리고 흔히 적벽가의 '눈'이라고 하는 새타령. 제가 제일 먼저 들었던 폴리돌판 적벽가에는 새타령이 없어요^^; 폴리돌판은 1920년대에 녹음된 걸로 지금은 맥이 끊긴 당시의 절창들이 부른 LP판을 복각해서 만든건데 음질이 듣기 썩 좋지는 않아도 이쪽도 재미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요즘 듣는 적벽가보다 굉장히 긴박한 느낌이거든요. 특히 숨넘어갈듯이 몰아치는 적벽 불나는 대목은 EBS 삼국지의 같은 부분이 이 부분을 현대화시킨 느낌이 들만큼 유사한 부분이 보인달까요.

그리고 적벽가에서 자룡을 묘사하는 수식어도 편애가 담뿍 느껴지지 않습니까. 물론 띄워주기의 절정은 조조를 대하는 관우부분입니다만, 수식어 따위 없는 위나라 장수들은 물론이고 주도독도 "연지같은 피를 토하고" 정도밖에는 아름다운(?) 수식어가 없는 판에 말이죠. 이런 편애 가득한 묘사 덕에 지금의 샤를왕자까지 이른 것 아니겠어요^^  

조선시대 과거에 나왔던 삼국지가 지금의 수능시험에 나올 수 있는 건 면면히 이어온 삼덕의 힘 덕분...은 아닐것이고 그만큼 여러가지 오만가지 인생사가 축약되어 있기 때문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건, 삼국지'만' 열심히 읽는다고 장원한다거나 S대에 수석합격하지는 않는다는 거 아닐까요. 저만해도 중2 1학기 기말고사때 그만 잡아버린 삼국지로 이날까지 삽질하고 있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