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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머무는 홍차가게 본문
최근...도 아니지만 아무튼 요즘 노는 동네를 연희동으로 옮겼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회사가 원래 놀던 곳 근처라서 놀다가도 회사사람 마주칠까봐 조마조마해서; 창가 자리를 피하고 있지만 출퇴근이 일정하지 않은 데다가 인근에 거주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마주칠 확률이 높고 마주치면 이래저래 불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퇴근한 뒤와 일 없는 날은 회사에서 가능한 먼 곳에 있고 싶은 것이다( mm
때문에 연희동 근처에 갈 만한 곳들을 검색하다가 홍차전문점이 있다길래 혹해서 가게 된 곳이 시간이 머무는 홍차가게 .
딜마 티샵은 차도 맛있고 누가케이크도 아주 옳고 바람직했는데 좌석이 많지 않은데다가 오래 앉아서 뭔가 하기에는 편안하지는 않은 분위기라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곳은 블로그에 보이는 이미지를 보니 자리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옛날 티앙팡 생각이 나더라. 지금의 티앙팡 말고 아주 오래 전에 지금 있는 자리-아직 그 자리에 있긴 있나 안 간지 너무 오래됐다;;- 건너편 건물 2층에 진짜 작은 다락방처럼 있던 시절의 티앙팡. 처음으로 홍차를 티세트를 전부 갖춰 마시고 우유푸딩을 처음 먹어보고 애프터눈 티세트도 먹어보고 아 돈을 벌어 쯔비벨무스터를 사야겠구나 마음 먹게 했던 그 옛날의 티앙팡말이다. 그 사이 내 취향은 쯔비벨무스터와는 달라졌고 티앙팡은 이런저런 파도를 헤치면서 그래도 고맙게도 여전히 있지만. 티앙팡과 이곳의 인테리어가 비슷한 건 아니고 차의 종류도 지금 돌이켜봐도 참으로 코어했던 티앙팡의 초기 메뉴와는 다르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아 홍차 좋아...하는 기운이 풍겨나오는 느낌이 초기의 티앙팡을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먹는 것에는 최선을 다하는 내가 그런 향수때문에만 갔을 리는 없다. 애프터눈 티세트가 구성이 좋은 데다가 가격도 좋고 무엇보다도 찻잔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이 매력. 전에 어느 카페에 갔는데 진열장에 놓인 커피잔들을 보면서 고를 수 있으면 저 잔이나 저 잔이 좋겠다 생각했는데 딱히 잔을 고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닌듯 해서 말은 안하고 커피를 받고 보니 나온 잔이 클림트의 키스가 안팎으로 그려진 잔. 클림트는 취향과는 별개로 좋은 화가이나 커피잔에서 보고 싶진 않아. 고흐를 좋아하지만 별이 빛나는 밤을 커피잔에서 보고 싶지는 않은 기분과 비슷한데 고흐보다 클림트 쪽이 훨씬 안 보고 싶음. 아니다,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고흐 쪽을 더 안 보고 싶은 것 같다. 하고 많은 잔 중에서 아 하필; 차라리 그냥 카페로고 찍힌 하얀 잔이 나을 것을;; 좌절하고 그래 잔이든 해골이든 커피만 맛있으면 그만 아니겠느냐 마시는데 같이 갔던 분이 와 여기는 커피잔도 예쁘네요ㅎㅎㅎ 해서 아...이분과는 역시 취향이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라 했던 적이 있다. 그 분과는 그 뒤 결국 안녕히. 물론 커피잔이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그게 취향이었다기 보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한 추임새였던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커피잔 취향이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중요한 건 잔을 고를 수 있다는 건 여러가지로 좋다는 말임.
친구랑 애프터눈티세트 먹기로 하고 전날 사전답사겸해서 갔던 첫 방문.
찻잔은 웨지우드 레이스 피오니. 차는 기억나지 않음; 프린스 오브 웨일즈였나?
고를 수 있는 찻잔은 크게 웨지우드와 노리다케 그외 유럽 브랜드 잔으로 나뉘어 있는데 웨지우드를 고른 건 내가 웨지우드를 엄청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노리다케를 좋아하시는 관계로 집에 있는 거랑 겹쳐서; 하지만 레이스 피오니 예뻤음. 아직 그릇덕의 싹은 트지 않았는데 예쁜 그릇은 좋아하니까 이렇게 고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다.
퇴근하고 바로 간 거라 저녁 겸해서 크림티세트. 차 한 가지와 스콘 두개, 잼과 크림으로 구성된 세트. 이날 스콘이 너무 빵빵해서 팝오버 수준으로 부풀어서 귀여웠음. 딸기후추쨈이었는데 통후추가 그대로 들어가 있지만 풍미가 기대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 궁금하면 떨지 않고 시도해도 될 정도. 크림이 클로티드 크림이 아닌게 좀 아쉬웠지만 치즈크림도 맛있었음. 메뉴판과 함께 시향할수 있도록 샘플을 주시는 게 특징인데 사진을 안 찍었다; 가향차 관심 있는 분들은 그런 부분에서도 좋을 듯.
애프터눈 티세트. 하루 전날 오전까지 예약해야 하는데 아주 좋고 바람직함.
오이샌드위치, 게살샌드위치, 고구마롤, 사과 케이크의 1단 레몬 마들렌과 스콘의 2단 그리고 사브레와 화이트초코케이크, 초콜릿 등등의 3단. 화이트초코케이크와 초콜릿을 뻬고는 모두 직접 만드신 것들.
차는 코로네이션 블렌드. 그래서 잔은 웨지우드의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 금반짝이ㅋㅋㅋㅋ 친구는 이모님 혼수 같다고 평했으나 이렇게 골라서 마실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금박잔에 마셔보리ㅋㅋㅋ
이건 친구가 마신 청초한 노리다케.
사진 보면서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던 티세트는 실제로도 좋았다. 오이샌드위치는 심플한 재료인데 맛있었고 오이가 엄청 얌전하게 썰려서 들어가 있는 것에 감탄했다. 게살 샌드위치도 맛있었고 고구마롤이 예상외로 달기만 한게 아니라 맛있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배가 찼으나 아직 티세트의 3분의 2가 더 남은 상태. 전날 먹었던 스콘은 여전히 좋았고 포베리잼도 좋았는데 나중에 따로 산 밀크티잼이 훨씬 맛있었음. 마들렌도 레몬 향기가 진해서 좋았는데 최고로 헉할만큼 맛있었던 건 사과 케이크. 사진에는 안 보임ㅠㅠ 모양을 보고 파운드 케이크류의 단단한 케이크일까 생각했는데 완전 맛있었음. 포슬포슬한데 적당히 촉촉하면서도 입에 달라붙지 않고 사르르 녹는데 위에 올린 사과조림도 맛있어서 차랑 먹기에 완전 좋았다. 이쯤에서 차를 추가하고 3단째를 공략하는데 맛이....진해ㅠㅠ 녹차 색깔의 저거, 입에 넣으면 보성녹차밭이 춤추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녹차다 궁서체 초록색 폰트로 배경에 쾅 뜰것 같은 진한 녹차맛. 사브레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홍차맛이었나. 3단째는 전체적으로 티세트는 3단을 다 먹기 전에는 끝난게 아니야!!라는 강렬한 느낌. 차를 부르는 단맛의 폭풍. 좋았다는 말임. 배가 부른 채로 어디 이 자잘한 것들도 맛을 볼까 방심하고 먹어서 좀 놀라기는 했지만 마무리가 조금도 약하지 않아서 좋았음. 사진에는 없지만 서비스로 더치커피도 작은 잔에. 여기가 좋은 게 홍차만 팔지 않는다는 것. 홍차라는 음료가 사실 호불호가 갈리는 것인데 커피도 팔고 그외 다른 음료도 판다는 점에서 선택의 여지가 넓고 누구 데려와도 부담 안 간다는 점에서 좋다. 게다가 커피도 맛있었음. 덕분에 이날 카페인 과잉섭취. 하긴 어디 카페인만 많이 먹었겠냐만은...( mm
그리고 더 바빠지기 전에 한 번 더 가고 싶다 해서 갔던 때. 잔은 역시 웨지우드 커튼콜. 이름때문에 골랐다.
차는 콤할배 고향 생각이 나서 아이리쉬 브렉퍼스트.
커튼콜 말 나온 김에 말하지만 햄슨 커튼콜 때 박수와 환호를 음미하면서 들이마시는 느낌으로 인사할 때 되게 좋음. 사실 그것까지도 퍼포먼스겠지만 보고 있으면 짧게는 2시간에서 길게는 4시간까지, 그것도 온전히 한 번에 못 보고 ebs 강의 보듯 며칠에 나눠서 보고 있는;; 나도 기특해지면서 같이 뿌듯해지는 느낌. 96샤틀레에서 자연스럽게 엘리자베타 역의 카리타 마틸라 손에 키스해주거나 13 오데온 광장 콘서트에서 콘서트마스터랑 악수하고 빌라존이랑 야닉 네제 세겡 부둥부둥해주는 거나 암스테르담 신포니에타랑 콘서트할때 받은 꽃다발을 다른 연주자 발앞에 나눠주던 것처럼 같이한 동료들에게 잘 했다고 수고했다고 표현해주는 것도 좋고. 뭔가 열심히 한 걸 잘 끝낸 사람의 긍정적인 에너지 같은 게 좋아서 가끔 처진다 싶으면 커튼콜만 돌려볼 때도 있다. 아, M22 돈 조반니 커튼콜은 제외;
사실 제일 좋았던 커튼콜은 역시 레미즈 라센 보러 다닐때였지만. 아직도 블퀘 막공때 생각하면...ㅠㅠㅠㅠㅠㅠ 스트리밍으로 유툽으로 영화관으로 접근성을 높이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그건 더 늘려야 하는 일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지향점은 공연장에 와서 보는 것, 현장에서 느끼는 것이라고 햄슨도 인터뷰에서 자주 이야기하는데 오페라가 아니더라도 모든 공연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레미즈 라센을 보러다니면서 직접 보는 공연은 영상으로 보는 공연보다 훨씬 더 나만의 공연이 된다는 느낌 때문에 통장을 희생했는데 카페에서 연하늘색 코트를 못 살게 굴면서 날아다니는 바오렐의 움직임-그렇다, 블퀘 공연 때는 이름 없는 아미 중 제일 먼저 다치는 아미를 바오렐이라고 불러줬다, 웨스트엔드에서 바오렐 불러준다는 말 듣고 부러웠는데 보고 있냐 우리도 바오렐이 있다, 아니 지금은 없지만 우리도 바오렐이 있었음ㅠㅠㅠㅠ-레드앤블랙 때 라마르크가 죽었다는 말에 절망했다가 앙졸라스의 말에 고개를 드는 푀이의 표정, 여관 호갱일 때의 보쉬에의 싱크로, 파리 룩다운에서 앙상블들의 그 모든 움직임, 바리케이드의 포격때 우는 졸리, 드링크윗미를 부르고 구석에서 울던 제그랑...영상이라면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편집의도대로 걸러지고 잘라져 보이는 것들이 현장에서 보면 온전히 내 시선, 내 관심에서 구성된 장면들로 남게 되니까 내가 그날 본 공연은 다른 누구와도 100% 겹치지 않는 내 공연이 되는 그 느낌. 불행히 내 기억력이라는 것이 영구한 것이 아니라서 캄맥은 오슷을 내놓아라 실황 영상을 내놓아라 울고 있지만 사실 현장의 공연을 보지 않고 영상만으로 이러저러하다라고 하는 건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상으로 봐도 아...캄맥 왜 저랬지 싶은 닉 조나스 같은 경우가 있지만 그것도 현장에서 봤으면 다른 배우 보느라 안 보고 잘 안 들었을테니까 훨씬 괜찮았을지도ㅋ
딴 얘기가 길었지만 아무튼 이날 사실 여기 가는 길에 있는 초밥집이 맛있다길래 밤샘작업 전에 초밥을 먹고 차를 마시자 초밥과 차 초밥과 차-하면서 갔는데 초밥집이 만석ㅠㅠㅠ금요일 저녁이었지ㅠㅠㅠㅠㅠㅠ 덕분에 우울한 마음으로 초밥초밥 울면서 갔는데 주문하고 나온 티코지가 커튼콜이랑 잘 어울리는 배색이라 기분이 좋아졌더랬다. 장미 무늬인 것도 어딘지 커튼콜하면 떠오르는 꽃다발 이미지랑도 어울렸고. 사진으로는 안 보이는데 여기 티팟 입구에 찻물 흐르지 않게 아주아주 작게 접은 티슈를 고정시켜서 주시는데 그런 세심한 포인트도 좋다.
초밥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내가 이 땅의 부르주아다.
그날 그날 달라지는 오늘의 케이크는 이 날은 유자케이크. 위의 크림에서도 유자향이 나고 안에도 유자가 듬뿍 들어있었다. 사과케이크만큼 맛있지는 않았지만 맛있었다. 사과케이크가 워낙 맛있었음ㅠㅠㅠㅠ
연희동 삼거리에서 찾기 쉬운 위치에 있고 집에 오는 교통편도 편해서 자주 가고 싶었는데 당분간은 힘들듯ㅇ<-< 콘센트도 많고 크지는 않지만 좌석도 제법 되는 부분도 좋다. 아무래도 동네 카페 분위기인 것도 마음에 들고. 거기다가 돌이 안 된 강아지가 있음★ 아직 어린 강아지의 장난기를 오랜만에 보는 거라 보고 있으면 막 혀짧은 소리가 절로 나오면서 흐물흐물 녹을 것 같음.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네드가 토시가 고양이한테 아기 말투 쓴다고 까는데 그건 네드가 고양이를 안 키워봐서 그럼. 개도 안 키워봤을거야. 핀츠한테 받은 고양이 키울 때는 네드도 혀짧은 소리 한 두 번은 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