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기다렸지만 기다린 것 치고는 기대를 상당히 내려놓고 봤다. 레미즈 원작 자체가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에 올리기에는 적합한 작품이 아니고 장르는 다르지만 이미 26년째 무대에 올라오고 있는 뮤지컬도 그런 한계 때문에 원작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어서 애초에 폭풍감동하고 울면서 나올 연극을 기대한 건 아니다. 지르지 않아도 후회하고 질러도 후회한다면 지르고 후회하자는 덕질의 경험에서 나온 결정때문에 일단 보자고 마음 먹었던 것. 11월 30일이 첫공이었고 sns 평들은 대체로 후하지 않았으며 홍보도 좋게 말해 고전적이고 솔직히 말해 무기력했으므로 기대를 내려놓고 관람 시작. 자리는 통장이 희생한만큼 좋았음.
고전 원작의 정극이라는 홍보대로 대사나 구성은 기본적으로 원전을 기초로 했다. 천사가 되거나 악마가 되거나, 주교보다 높이 오르거나 도형수보다 낮게 떨어지거나-하는 발장이 새로 태어나는 중요한 부분부터 마리우스와 질노르망의 갈등의 소도구인 남작 명함도 등장해준다거나하는 소소한 부분까지 원작에의 충실성을 놓고 본다면 생각 이상으로 괴이한 재해석은 없이 원작 그대로 큰 흐름이 진행이 되는 편이다. 그덕에 원작에서 좋아했던 부분과 대사를 직접 보고 있다는 점은 좋았다.
그래서 만족했는가-라고 하면 절대 아님.
이 아래로 치우친 시각에 근거한 쓴소리 잔뜩.
할 말이 너무 많으니까 정리가 안되는데 일단 제일 큰 덩어리부터 이야기해보자. 바리케이트.
성분을 분석하자면 나는 ABC의 벗들보다는 자베르덕에 가깝지만 그런 나한테도 바리케이트는 단순한 만남의 장이 아니다. 그래서 바리케이트를 어떻게 다루었는가가 자베르를 어떻게 그려냈는가와 비등비등하게 걱정거리였고 관심거리였다. 연극의 바리케이트는 염려했던대로 빼도 박도 못할 신파다.
뭐 덕심을 버리고 냉정하게 보자면 해석 나름이고 꽃같은 젊은 애들이 죽어나갔으니 신파로 가도 틀린 건 아니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데 신파조의 바리케이트는 싫다. 적어도 그건 레미제라블의 바리케이트가 가져야 할 몫은 아니다.
얼핏 언급한 적이 있지만 뮤지컬의 Turning을 정말 싫어하는데 그 이유가 희생에 대한 애조만 있고 그에 상응하는 앞을 향한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1832년 6월의 바리케이트는 주된 역사에서 채 한 줄을 차지하지도 못하는 사건이다. 1830년 7월혁명 이후 1848년 2월혁명까지 수많은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무너지고 ABC의 벗들같은 무리들이 18년의 시간 동안 죽어갔다. 피와 젊음과 분노를 적립해가며 더럽게 느리게 겨우겨우 역사가 움직여 간 것이다. 그럼 신파가 될 수도 있지 뭐가 문제냐고?
대혁명도 7월혁명도 2월혁명도 파리코뮌도 아닌 그 6월의 바리케이트의 죽음은 그 목숨값으로 당장은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그 손해본 듯 보이는 결과가 내일을 위한 순수한 희생제물인 동시에 비참함에 주저앉지 않고 빠져나오려는 인간의 의지와 희망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기득권의 재분배와 권리의 확대라는 건 역사에 혁명이라고 이름 붙은 거대 이벤트로 단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누구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인식하고 자유와 평등이 당연한 가치로 인식되기까지 1832년 6월 같이 이름 없고 대가 없는 목숨들이 차곡차곡 쌓여준 거다. 당장 오늘 내 빵을 내 자유를 얻어준 게 아니라 언제가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올 그날을 위한 일어섬과 희생.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바리케이트에 있어야 하는 건 눈물이 아니라 에너지다. 맨 처음 노역수들의 분노에서부터 공장, 사창가, 파리의 슬럼가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비참한 자들의 분노가 쌓이고 쌓여 터지는 순간, 가난때문에 죄를 짓고 몸을 파는 비참한 자들이 눌리고 밟히다 못해 튕겨 일어나는 순간인데 그걸 단순한 슬픔으로만 처리하면 내내 풀이 누워있기만 할 뿐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순간은 없다. 눈물과 한숨을 보내고 싶다면 그건 그렇게 힘들게 공화정 가놓고도 루이 보나파르트를 골라 다시 제정으로 가는 씁쓸한 민중의 선택에 보태주면 될 일이다. 민주적 보나파르트주의 따위 껒ㅗ
그런 의미를 가진만큼 바리케이트를 세울 때 ABC의 벗들과 시민들은 여기서 죽자-가 아니라 여기서 민중이 일어나 우리와 함께 서기를 기다리자-라는 마음이었다. 생각하면 나이브하기 그지 없는 작전이지만 그 믿음이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대주제와 연결이 되면서 바리케이트가 클라이막스로서 자리를 잡는 건데 초반부터 민중에 대한 믿음도 혁명에 대한 확신도 하다못해 젊은애들다운 밝은 미래에 대한 꿈이라도 보여주기 전에 일단 지나간 시절부터 그리워하면서 애조 띈 노래를 부르며 죽을 자리 찾는 것처럼 나오는 바리케이트라니. 원작에서 바리케이트를 죽을 자리로 찾았던 건 혁명을 믿지않는 그랑테르뿐이고, 그 그랑테르조차도 죽는다가 아니라 앙졸라스와 함께-라는데 강조점이 있었건만.
바리케이트 테마 음악은 프루베르의 서정시에서 나온듯 보이니까 크게 틀린 게 아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프루베르도 서정시 읆기 전에 일단 바리케이트 쌓고 탄환을 나눠받았다. 무엇보다도 원작에서 프루베르의 서정시는 그 긴장과 그 고요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사랑의 시를 읊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 젊은이들은 바리케이트에서 죽음을 앞에 보고 짧은 생을 뒤돌아 보며 눈물짓는 젊은이들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삶을 보는 젊은이들이다. 그 젊음이 1832년 6월의 바리케이트를 단순한 폭동이 아닌 전진하는 반란으로 규정지을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다.
르 카뷕 부분은 시간상 생략했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도 국민군복을 두고 서로 양보하는 모습은 어디가고 서로 입고 빠져나가려고 앞다투는 건 일단 원작하고도 정반대의 연출이다. 자네에게는 누이가, 자네에게는 늙으신 어머니가, 자네에게는 어린 자식이 하고 양보하며 서로 자기를 바리케이트에 남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가운데 발장이 던지는 한 벌의 군복이 하늘에서 구원처럼 내려오는 건 없고......냉큼 주워입고들 도망가심...군민군복을 걸친 아줌마라는 건 사실 수상하지 않냐는 디테일은 접어두고라도 어떤 선동이나 정치적 결실을 노린 공작에 의한 집결이 아니라 민중이 일어났다 쓰러지는 가운데 인간애가 피어나는 장면인데 아 몰라...레알 진지하게 이거 왜 이렇게 뒤집어서 각색했나요 묻고 싶었다ㅇ<-<
애초에 바리케이트가 이렇게 된 건 앙졸라스와ABC의 벗들의 캐릭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베르가 비인간적인 법의 비정함을 인격화했다면 앙졸라스는 순수한 혁명의 정신을 인격화한 캐릭터다. 애초에 정말 많이 기대 버렸지만 그래도 혁명천사라고 해서 한 가닥 기대는 안 버리고 간직하고 있었는데 사랑도 혁명처럼!을 외치는 앙졸라스에서 일단 말을 잊었음. 아니 사실 그 전에 쿠르페락이 마리우스에게 자네는 무슨 파야?라고 묻고 마리우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답하자 가감없이 그럼 우린 동지!!라고 악수하는 걸 볼때부터 불안하기는 했다. 쿠르페락은 안전한 회색주의자도 뮈쟁으로 끌고가 혁명에 뛰어들 기회를 주는 사람이지만 왕당파 아니면 다 우리편이라는 동지가 부족해 관대해진 공화파는 아니었는데. 말 나온 김에 하자면 연애따위 사치다 혁명! 투쟁! 이런 혁명파 캐릭터가 우리 정서랑 안 맞는 것도 아닌데 왜 앙졸라스 캐릭터를 못 살린 건지의문임. 당장 좀 윗세대들 얘기 들어보면 최루가스 마시던 시절에 이런 사람들 있었다 소리 쉽게 들을 수 있다. 앙졸라스만큼 순수하고 철저하고 강력하고 눈부신 혁명의 화신인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무슨 엄청 복합적인 캐릭터도 아니고 상징 그 자체잖아. 왜 못살리지? 대체 왜?!
바리케이트 부분에서 앙졸라스라는 리더를 세워놓는 건 원작의 충실한 재현때문에만 필요한 게 아니라 극의 흐름상 발장과 자베르와 마리우스가 휩쓸린 시대의 힘과 혁명의 힘을 보여주는 역할이 필요해서다. 단순히 금장식 들어간 빨간 조끼입고 붉은 깃발 휘두르다 장렬하게 죽는 캐릭터가 필요해서 넣은 게 아닌 것. 연극의 앙졸라스는 다들 대장으로 알고 있기는 한데 무대 위에서 벤치위에 올라 연설하는 것 이외에는 ABC의 벗들의 리더로서의 비중이 없다. 심지어 바리케이트의 동선도 프루베르로 추정되는 캐릭터에게 깃발을 넘겨받아 쓰러지는 마지막까지 그냥 공화파 학생1쯤의 느낌. 오히려 프루베르인지 콩브페르인지로 추정 되는 학생 쪽이 힘도 세고 움직임도 더 눈에 띄었음. 배우 개개인의 연기의 문제라기보다는 연출과 대본의 문제라고 본다.
가능한 뮤지컬과는 비교 안 하려고 했는데 뮤지컬의 앙졸라스가 2막을 이끌어가기 때문에 바리케이트씬이 중심을 잡고 있는데 비해서 연극의 바리케이트는 지리멸렬...많이 순화해서 어수선했다. 사랑도 혁명처럼! 꺄르륵거리던 젊은애가 막상 혁명 시작하고 나서는 와인 나눠마시고 기운내자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한 시간 뒤면 죽을거야-하는 원작 대사 외쳐봐야 바리케이트는 청춘의 무덤이 될 뿐이지 혁명의 숭고함 혁명의 경건함 혁명의 눈부심 그런 거 없음. 대장이 저 모양이니 다들 얼른 국민군복 주워입고 도망가려고 하지. 아, 이런 개연성을 노린건가.
바리케이트에 대한 이런 불만은 덕덕한 시각 탓이라 놓고 치더라도 바리케이트의 구성은 그 자체로 심각했다. 이틀째 공연이니 앞으로는 나아지려나 싶기도 한데 아니 나아지지 않으면 곤란한걸. 개연성이 여기서부터 날아가고 사건은 그냥 쏟아진다. 에포닌이 총을 맞고 자신이 죽으면 이마에 키스해 달라는 약속을 하고서 마리우스에게 코제트의 편지를 건네주자 마리우스가 가브로쉬를 불러 코제트에게 답장을 전해주면서 돌아오지말고 빠져나가라고 하는데 이 시점에서 에포닌 아직 안 죽었음. 죽어서 키스하고 편지 보낸 줄 알았는데 죽은줄 알았던 에포닌이 살아있어서 놀라고 저 간절한 부탁에도 애인한테 편지부터 먼저 보내는 마리우스의 이기주의에 놀라느라 마리우스가 그래서 에포닌한테 키스를 했는지 말았는지 기억이 혼미함. 그리고 에포닌을 혁명의 첫 희생으로 삼고 그 이름을 기리자는 건...말 안 하겠다. 아 그래 비참 속에 핀 장미는 맞고 비참한 사람들중 하나인건 맞지만 진짜 아 쫌!!!!!
총격 가운데 저격수가 있다는 외침은 있지만 발장이 뭘 했는지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발장은 대뜸 앙졸라스에게 자베르를 넘기라는 말부터 한다. Honest work가 있어야 Just reward가 있는거 아니었나요. 아무리 그래도 맨입으로 달라고 하시면 곤란한데. 그리고 이어지는 발장과 자베르의 씬은...자베르 얘기할때 하겠음. 바리케이트에서 정신없이 상실된 개연성은 하수도에서 테나르디에와 마주치는 부분에서 정점을 이루어서 결말의 마리우스의 회개가 뜬금없어진다. 테나르디에의 협박이 없고보니 어떻게 마리우스는 발장이 자기를 살려준 은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진 것. 애초에 마리우스는 자기 누가 살려줬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음.
이렇게 사건이 나오는데만 급급해지다보니 사건과 사건이 이어져 클라이막스로 달려가는 호흡이 산산히 흩어졌다. 결말까지 팽팽하게 얽힌 긴장선을 따라가는게 아니라 뿌린 떡밥 주섬주섬 주워담는 기분. 약간만 신경쓰면 될 부분이 이렇게 되어버린 건 왜 그런지 모르겠다. ABC의 벗들 캐릭터를 살리기 힘들었다면 차라리 앙졸라스-마리우스를 한 중심으로 잡고 발장-자베르를 다른 중심으로 삼아서 촛점을 모으든가 했으면 나으려나 아무리 본 걸 재구성해봐도 산만함. 거기다 다른 건 그렇다쳐도 테나르디에건은 왜 없앤 거야 스토리에 구멍 크게 나는건데. 하루 지나고까지 곰곰히 생각하니 러닝타임때문에 생략했나 싶은 의심까지 갈 정도로 어이없이 버린 부분이다.
대충 바리케이트 불평은 다 한 것 같으니 여기서 그만 끝.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는 보쉬에가 삼단같은 엘라스틴 머리를 하고 졸리가 곰팡이 핀 식빵쯤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그랑테르가 금욕주의자 광신도로 나온다고 해도 바리케이트가 가지는 그 빛과 그 힘만 제대로 살려냈으면 만족했을 단순한 사람임. 아, 좀 다른 무대 구성을 기대하기는 했는데 딱 구도가 너무 뮤지컬 바리케이트 구도라서 재미없는 것도 있었음. 그 각도가 제일 바리케이트 안에 있는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그래놓고 앙졸라스는 객석을 향해 쓰러지면 임팩트는 둘째치고 동선이 좀 안 맞지 않나. 등 뒤로 총맞고 죽은 거잖아.
그리고 본론;인 자베르.
삼국지 덕질을 하다보면 패시브 스킬로 얻게 되는 게 한가지 있는데 그건 원작의 변용에 매우 관대해진다는 점이다. 장합이 이름 발음때문에 나비 컨셉의 오카마로 나오든, 유비가 꽃변태 핑크푸들로 나오든, 제갈근이 레알 당나귀로 나오든, 방통이 양갈래 방울머리를 하고 나오든 일단 당황하고 난 뒤에 찬찬히 보고 그 괴악함 가운데 무언가 내가 원작을 보고 혹했던 부분을 건드리는게 있으면 수긍하고 납득하며 심지어 그걸 파들어갈수도 있게 된다. 즉 아무리 기대를 버리고 간다고해도 원작을 좋아하는 만큼 어떤식으로 변용되든지 자베르라면 보고 싶은 부분들이 있었는데 어....음..........계속 곱씹어봐도 이게 연기의 문제인지 대본의 문제인지 연출의 문제인지 모르겠음. 사실 이미 자베르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보니 자꾸 이 기준으로 보게되어서 내 시각이 너무 PQ 편향적으로 왜곡되어있다는 걸 감안하고 봤는데 열심히 봤는데 눈도 안 떼려고 되게 애썼는데 연극의 자베르 심심하고 단순했고 산만했다. 음, 너무 심한가. 근데 정말 그랬음ㅠㅠ
이걸 대체 뭐부터 얘기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자베르의 등장은 툴롱부터고 발장에게 통행증을 주는 등장이다. 그러니까 내 설정은 1800년에 툴롱 떠난 걸로 보고 싶지만 그건 내 설정이고 이게 친절한 등장인 건 인정. 저런 도둑놈 탈옥수를 가석방이라니-하고 분노하다가 법이니까 풀어줌하는 첫 등장까지는 오호~하고 봤음.
그리고 공장 사장이자 시장으로 마들렌느로서 살고있는 발장을 찾아와 인사를 하는 재등장. 자베르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진 마들렌느가 여반장의 말을 듣고 대충 팡틴을 해고해버리고 얼른 자리 피해 도망가는 연결까지도 잘 봤다. 그러고보니 1막까지는 음 별로 포스팅할거리 없겠다고 안심했는데; 그리고 마차씬.
연극에서는 마차씬을 시장이 마차를 들어올려 포슐르방 영감을 구해주는 걸 보여주고 그걸 전해들은 자베르가 부하와 이야기하면서 의혹을 품는 걸로 연출된다. 이거 원작대로 시장에게 제가 아는 한 단 한 사람만이 이걸 할 수 있다, 가석방을 위반하고 사라진 죄수 24601 장발장이라고 떡밥 던지는 자베르와 그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전 대신 자신을 증오하는 포슐르방의 안전을 택하는 발장의 결단이 주는 기싸움으로 갈 수 있는건데 대체 왜 그걸 피하고 잡담같은 의혹으로 처리했는지 아쉬웠다. 애초에 그걸 연상시키게 하려는 장치로 첫부분에 돌덩이 혼자 들어올리는 장면 넣은거 아니었나. 단순히 증오에 찬 범죄자로서의 면을 부각시키는 장치로 쓰기에는 아깝잖아. 아무리 발장이 주인공 보정받아서 힘세고 똑똑하고 돈 잘벌고 관대하다고 해도 원탑이어서는 긴장이 약하니까 계속 자베르와 대립각이 서고 배우 간에 팽팽하게 맞서는 걸 보고 싶었는데...............
그 뒤로 이어진 팡틴 체포부분은 98 자베르의 악몽이 떠올라서 공포로 숨을 삼켰다. 아으 팡틴 그렇게 때리면 그 자베르가 생각나잖아ㅠㅠ 이부분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자베르 해석과 연관이 되는 부분인데, 자베르라는 캐릭터가 주는 공포를 표현할 수 있는 건 사실 폭력보다는 확신에 가득한 권위가 주는 위압감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을 빌어오자면 제 아무리 악랄한 범죄자라도 나는 자베르는 쏠 수 없어라고 총을 내리게하는 무게감. 법이라는 것 자체가 소란하고 광폭해서 무서운 건 아니고 침착하고 완고한 논리가 인간성을 배제한 채로 숨통을 조이는 그 싸늘함이 무서운 거지.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다그치고 빈정거린다고 자베르가 가지는 존재감이 나오는 건 아니다.
팡틴 체포를 놓고 시장과 감히 대립하다가 시장에게 파면을 구하는 부분은 사실 제일 보고 싶었던 장면...인데 일단 경감님 윗사람에게 그런 중대한 범죄를 자수할 때는 모자부터 벗으세요. 애초에 그거 노린 소품이 아닐까했는데 무릎 꿇을 때까지도 꿋꿋하게 안 벗으시더라. 자기고발 장면에서 자베르의 삽질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기를 더 낮추고 더 발장의 발 앞에 내던질수록 다가오는 반전에서의 고양감이 커지는데 심심했음. 경찰권에 대한 행정권의 침해로 말이오?라고 할 때 시장님이 보기 드문 웃음을 보이는 디테일은 애초에 기대도 안 하기는 했다. 사실은 보고 싶었어.
모자를 벗고 안 벗고의 문제가 아니라 파면을 구하는 대사 자체도 안 가려운 다리 긁어준다는게 문제였다. 저라면 이런 범죄에 대해 파면을 명했을겁니다-로만 끝나면 자베르는 그냥 모진 캐릭터가 되고만다. 남에게 엄격한만큼 자기에게도 엄격해야한다고, 친절하기는 쉽지만 정당하기는 어렵다고 자신의 파면을 요청해야 자베르가 단순히 독하고 성격나쁜 경찰이 아니라 그 잔인한 완고함 속에 어떤 긍지가 있는 인물이라는게 드러날텐데 왜 그렇게 밋밋하게 대사가 나왔는지 서운했다. 최소한 발장이 악수를 청하고 그걸 자기는 악수할 자격도 없는 밀정에 불과하다고 거절하는 부분이라도 나와주든가. 자베르의 어조 자체가 연극적이라서 그대로 대사로 옮기는게 어려운것도 아닌데 그냥 조낸 독하고 끈질긴 경찰로 가버리다니 왜 캐릭터를 막 그렇게 버려ㅠㅠ
원작 그대로가 아니라서, 좋아하는 대사를 못 들어서 서운하고 아쉬운 것 만은 아니다. 원작을 옮기는 2차에서 제일 중요한 건 해석과 캐릭터다. Stars 잡담할때 말했지만 뮤지컬의 자베르가 발장의 대립역으로서 제대로 서게 된 건 그 자베르의 특성을 드러내주는 작업이 있었기때문이다. 비록 그 해석이 원작과 100%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해도 적어도 뮤지컬 내에서는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잡혔다. 연극에서는 그게 없었다. 연기나 연출의 문제 이전에 대사의 문제가 제일 컸다.
한편 발장체포씬에서는 원작 대사를 그대로 읊어주었으나 연기와 연출이 취향이 아니었다. 범죄자의 은신처를 찾아내 현관문을 발로 걷어차 들어가 나쁜 놈을 때려잡는 형사의 조급함과 쾌감과 승리감만 필요한 부분이 아니다. 발장을 몰아쳐 범죄자로서의 모습이 드러나게 한 건 나쁘지 않았으나 대천사 미카엘에 비유된 그 오만하기 그지없는 법에의 눈부신 자기도취가 없었다. 앞에서 말한 자기 고발의 삽질이 충분하지 않았으니 어쩔수 없는 결과겠지만 여기서 자베르가 법의 권위를 빌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최후의 추락이 극적이되건만. 딱히 자베르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극 전체가 그런 오르내리는 텐션이 부족했다.
'50대에 맨손으로 무장경찰 셋을 때려눕힌' 타이틀을 획득한 발장이 도망치고 난 후에 자베르와 국장의 대화가 잠깐 이어진다. 파리로의 영전인데, 여기서 맨 앞에서 이야기한 마담 자베르의 이름이 나오는거다. 승진도 했으니 결혼할 생각 없나-는 국장의 물음에 저는 법과 결혼했습니다라고 답하는 자베르. 앙졸라스의 애인인 파트리아-조국과 자베르의 반려인 법이 서로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부분에 혹했던건 이게 아니라 자베르가 발장을 쫓는 근본적인 이유를 자기의 출생을 말하며 밝히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 아무래도 기대를 더 많이 내려놓고 갔어야했다. 자베르의 캐릭터를 살릴 부분이 그냥 흘러가 버리는 걸 보는 안타까움...자베르 캐릭터도 신경 좀 써주세요...중요한 캐릭터 아니었나요.......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바리케이트......바리케이트..그래 바리케이트 얘기를 또 해야하는구나. 바리케이트에 잠입한 자베르는 붕대를 감는 여자들 옆에 앉아있다가 잡히는데 뻘하게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생각나서 속으로 뿜었다. 시간도 하루가 지나서 애매한데 가브로쉬가 자베르가 경찰인 걸 인식하게 되는 부분이 미리 나왔는지 기억이 안나네.
발장이 살려보내주는 부분의 자베르 대사는...왜 이래 원작 그대로만 가도 충분하고도 넘치는데 왜 여기는 또 발장에게 악마라고 절규하는 부분이 들어가서는...쓰기 싫다. 아으 제발 좀 이라는 생각때문에 언제부터 자베르가 발장에게 존대를 하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수도에서 발장을 만나 살려주고 이어지는 자살씬의 대사도 피상적이고 안일하다. 허공에 쏜 총알이 되돌아와 심장을 꿰뚫고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고 법과 정의를 위해 헌신해온 인생이 산산히 부서지고 이제 그만하자-.
진짜 울고 싶었음.
적어도 굴러서 퇴장하지 않았다는 걸 위로로 삼을까.
말 나온 김에 하자면 자베르가 최후로 보는 어둠은 사실은 어둠이 아니라 부엉이의 눈이 마주하는 빛이라고 해야 옳다. 뮤지컬에서도 별이 보이지 않고 공허만을 보고 있다고 노래하는 건 그래서 사실 원작하고는 좀 다르지만 아무튼 자베르의 죽음을 그렇게 못 다뤄주다니 앞에서 나오는 걸 보며 기대를 버리고 또 버려도 에이 그래도 설마했던게 원작의 자베르의 최후 부분에서 ctr+c ctr+p만해도 대사가 되는데 설마 그렇게 간단히 정리해줄 줄은 몰랐다. 발장 최후는 원작 대사 살려주면서 왜 자베르는...?
뭐가 이렇게 길어지고 있는건가 싶지만 어차피 하는거 다른 부분도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 안 남겨놓으면 또 언제 남겨놓겠어.
테나르디에.
원작 읽으면서 제일 무서웠던 건 테나르디에였다. 심지어 최후까지 살아남더니 미국가서 노예상인으로 대성했다는 후일담까지 읽으면서 이런 인간이 살아남아 성공하니 아직도 비참한 자들이 존재하는 세상인거지 싶을 정도. 연극에서는 어릿광대역에 가까운데 테나르디에-마리우스 관련해서 하나는 앞에서 말한 마리우스의 생명의 은인이 발장이라는 걸 밝혀줄 떡밥, 다른 하나는 마리우스의 아버지의 은인이라는 오해라는 떡밥. 이게 둘다 수거가 제대로 안 되고 흘러갔다. 그럴거면 워털루 전쟁에서 퐁메르시 구한 이야기는 아예 넣지를 말든가. 코믹하게 그려지는 고르보하우스 부분에서 그래서 마리우스는 아무 갈등도 고민도 없다. 좋겠다 마리우스. 그러고보니 나중에 장인님=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도 돈 안들이고 거저 알았겠네. 어차피 고민할 시간 줄일거면 경감님도 내모자는 어때? 대사라도 날리면서 같이 참가하시든가. 테나르디에 무덤론은 연극으로 보고 싶었던 부분인데 없더라. 하기는 무리겠지.
팡틴은 비참해진 시절에도 깨끗해보여서 바마타브와의 결벽증을 의심하게 된다는 건 농담이고, 팡틴의 죽음을 두고 발장이 수녀님 팡틴은 회개했겠지요?라고 묻는 부분은 마음에 안 들었음. 팡틴의 인생이 회개가 필요한 인생이었나? 아니잖아. 보속이 필요하다면 딸을 위해 겪은 비참함으로 이미 충분하고 이 부분은 자베르를 압도한 발장이 절망에 빠져 죽은 팡틴에게 연민을 담아 속삭이자 그제야 팡틴의 얼굴이 평화로워졌다는 거라서 회개를 묻는 건 정말 다시 생각해도 아니었다. 주교가 발장에게 은그릇과 은촛대를 줄때 회개여부를 확인하고 준게 아니라 일단 주고 정직한 사람이 되겠다고약속해달라고 했는데 그 전후 순서가 중요한거 아닌가. 비참한 자에 대한 신의 사랑과 구원이 미사에 나와야만 받을 수 있는 빵같이 조건부 자비는 아닐텐데.
그리고 코제트와 마리우스 커플이 귀여워서 응원해주고 싶었고, 에포닌은 좀더 비참한자들에 가깝게 나왔어야 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에포닌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게 부끄러운 소녀가 아니라 곰팡이핀 빵껍질도 남의 방에서 뒤져내 갉아먹고 보는 아이니까. 아역들은 아역이니까 귀여웠다. 코제트가 8년이나 눈치밥을 먹고 살았으면서도 소리내서 앙앙 울수있다는게 흠좀...이었지만 눈내리는 가운데 아빠라고 발장 부르는 부분은 아무튼 귀여웠음, 앙졸라스에게 애송이라고 욕하는 가브로쉬 부분이 나온 것도 그러고보니 좋았다. 그리고 예상 외로 2막에서 확 집중할 수 있었던게 묘하게도 질노르망과 마리우스가 등장할때였다. 산란하게 흩어졌던 공기가 모이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신기했음.
그리고 사소하게는 마리우스의 조끼 색이 검정이어야 하지 않나 하는 거랑 코제트가 결혼한 다음 외롭게 홀로 사위어가는 발장을 보여주는 부분의 배경음악이 또 그 애조의 바리케이트씬 음악이라서 거슬렸던것 정도...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좋은 자리 앉아서 팔장 끼고 비웃음 물고 오냐 얼마나 잘들 하나 보자라고 꼬아서 보고 온 것 같지만 어제 두 시간밖에 못 잤는데도 불구하고 맑은 정신으로 단역 동선 하나 안 놓치려고 애쓰고 손바닥 아플만큼 박수치고 프로그램과 OST CD까지 사들고 온 걸로 모자라 다른 캐스트로 한번은 더 볼까, 며칠쯤 지나면 좀 안정이 되고 궤도에 오르려나, 어느 날짜를 골라야 올라올수도 있다는 전직 장관을 피할 수 있나 고민하고 있는 호갱임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