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육손은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 무더기라 여겼다. 입음새에 몹시도 신경을 쓰는 그가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아 벗어버린 옷을 미처 치우지 않은 것이라고. 필시 또 하늘빛이 옷과 안 어울린다느니 함께 걸쳐야 할 패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느니 옷의 주름이 깔끔하게 잡히지 않았다느니 하는 시답지 않은 이유로.
제 손으로 치울까 아니면 사람을 부를까 생각하며 보는 사이 바닥에 허물어진 그것이 꿈틀 움직이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육손은 서둘러 다가가 쓰러진 사람을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취기 때문에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잡는 순간 느껴진 것은 위험할 정도의 열기. 나직한 신음을 흘리는 여범을 부축하며 육손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는가!!"
어울리지 않는다. 왕공에 뒤지지 않을 화려한 옷을 벗기고 나자 드러난 맨살에 새겨진 것은 처참할 만큼의 상처, 명백한 악의와 폭력의 흔적이었다. 어떠한 형구를 어떻게 쓰면 그러한 상흔이 남는지 이미 알만큼은 아는 육손은 눈살을 찌푸렸다. 찢기고 패인 위에 세월이 덮이기는 했으되 이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혹독한 흔적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말아. 이래 뵈도 영광의 상처니까."
누운 쪽은 태평한 목소리에 웃음까지 담아 말했다. 육손은 대꾸하지 않고 의원이 가져온 약을 받아 건넸다. 훈기처럼 피어오르는 약냄새에 여범이 고개를 저었다.
"아, 그것 말고 잘 듣는 약이 있어."
이만한 세월이 지난 상처고 보면 몸 상태를 제일 잘 아는 것은 본인일 것이다. 육손은 약을 다시 쟁반에 얹었다. 상비약을 지니고 다닐 만큼 시달려온 것일 텐데 진작 눈치를 채지 못한 자신이 아둔하게 느껴졌다. 공연히 부산스레 일어서 여범에게 물었다.
"어디 있습니까. 제가 가져오지요."
"저어기. 탁자 위에."
느긋하게 대꾸하는 답을 따라 눈을 돌려보니 익숙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흙으로 빚어 만든 항아리 하나.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지난 밤, 손수 건네는 것을 받아마셨으므로 잘 알고 있다. 거칠고 독해 냄새만으로도 어지러운 묵은 술. 육손은 내려놓았던 약을 다시 들었다.
"농담 마시고 한 번에 다 드십시오."
"쭉 들이키고 푹 쓰러져 자면 내일은 멀쩡하게 일어날 테니까 속는 셈 치고 믿어보래도."
"좀 더 자신을 소중히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주제넘게도 내어버린 말에 굳어진 것은 육손 자신이었다. 여범은 더는 장난기 없는 눈으로 말했다.
"독주보다 더 나쁜 걸 쌓아두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닌데?"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도망가기만 하는 게 언제까지 통할까, 백언."
고통으로 두드러지는 그늘 속에서 이편을 보는 눈을 감당치 못하고 육손이 고개를 돌렸다. 때문에 여범은 부축 없이 혼자 몸을 일으키면서 신음을 흘렸다. 뒤늦게 내미는 손을 모른 척 무겁게 일어나 앉은 여범이 제 손으로 약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어차피 잠이 들게 하는 건 약이나 술이나 마찬가지니 굳이 군의를 괴롭힐 것은 없지 않나."
고개를 숙여 빈 그릇을 받아든 군의가 절하고 물러나갔다. 뒤따라가려는 육손을 여범이 손짓해 잡았다.
"도망갈 때는 도망가더라도 아픈 사람은 좀 도와줘야지. 매정하기는."
펄펄 끓는 열이 그대로인 몸을 부축해 엎드리게 하자 여범은 팔위에 턱을 얹고 다시 육손에게 눈짓했다. 순순히 의자를 가져다 침상 옆에 놓고 육손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앉았다.
"여간해서는 낯색 흐트러뜨리는 법 없는 사람이 하얗게 질린 걸 보니 흉이 심하긴 심한가 보군."
"결례를 범했습니다."
딱딱한 사과에 여범이 웃음을 흘렸다.
"이왕 미안한 김에 약이나 발라주게."
눈이 가리키는 대로 침상 곁의 함을 열자 서찰 몇 통 곁에 바르는 약이 담겼을 법한 작은 병이 있었다. 마개를 열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나는 것이 지난 번 발목을 접질렀을 때 건네주었던 약과 같았다. 손에 덜어낸 것을 흉터로 뒤덮인 자리에 조심스레 문질렀다.
"몸이란 것이 신기하단 말이야. 머리로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어김없이 날짜가 되면 꼭 기억을 시켜주거든."
눈을 감고하는 소리는 딱히 상대를 정해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육손은 묵묵히 약을 발랐을 뿐 답하지 않았다.
"벌써 지나간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 아물어 굳어진지 오래다, 모두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그랬는데 우습지 않나. 강도江都의 형리는 이미 내가 빠져나오던 날로 죽어 백골이 되었을 거고, 형리에게 명을 내린 도겸 역시 무덤 속에 들어 서주도 더는 그의 땅이 아닌데. 묵은 상처만큼은 행여라도 잊을세라 다시 두드려대거든. 죽은 사람이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산 사람에게는 그만이 아니라-꼭 한 번씩 일깨워주는 독한 선생들이야."
육손은 다시 병을 흔들어 약을 덜어냈다. 이만한 상처라면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답을 말해주었다. 강도는 주군의 모친, 태부인이 머물던 곳이다. 그리고 도겸은 당시 소패왕이라 이름 높던 청년을 몹시도 꺼리고 싫어했었고. 여범이 잠긴 목소리로 말한 죽은 사람에는 그 소패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역시도 자연스레 떠올라버렸다.
"오래 품어봤자 독이 될 뿐이니 흩어야 한다 잊어야 한다 생각을 해도 도시 쉽게 잊혀지고 떠나가 주지를 않아. 그러니 먼저 떠난 사람들이란 다들 매정하고 매정할 뿐."
이 사람은, 본디 소패왕의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잃고 패업도 잃고 군세도 잃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절망만을 그러쥔 청년에게 무작정 투신했던 사람. 가장 쓰디쓴 시절의 그와 고난을 함께 했던 사람. 모든 걸 걸었던 그를 잃고도 살아가는 사람.
"그런데 해마다 이 곤욕을 치를 때마다 그런 생각도 들지. 나는 다시 일 년을 살았구나. 살아 있구나. 살아서 기억하고 있구나."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여범이 육손을 돌아보았다. 묵묵히 약을 바르는 손을 멈추지 않고서 육손은 그 눈을 교묘하게 피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질려서 볼 건 없어, 백언. 이건 내가 살아있다는 가장 자랑스러운 증거니까. 그 분 없이도."
그 분 없이도. 담담하게 입에 올리는 그 말에 사무치게 배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리움만으로는 부를 수 없는 차라리 절망에 가까운 슬픔. 스스로는 겪어본 적 없는 것이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모르는 체로 지나가면 좋을 것.
사적으로 대할 때면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사람이다. 비애니 회한이니 하는 감정들은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훌훌 던져버릴 사람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낼 목소리가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는 말에 짙고 무겁게 드리운 것들을 모른 척 하며 육손은 약병을 다시 봉했다. 다행히 여범은 약기운에 잠이 들었는지 더는 말이 없었다. 손에 묻은 약을 닦아 내고 나서 여범을 덮어줄 것을 찾아 일어섰다. 겨우 잠들었으니 깨워서 옷을 입으랄 수도 없는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몸을 차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정말 도망가는 건가? 실망이네.”
일어서는 기척에 따라붙는 소리에 육손은 정색하고 대꾸했다.
“덮으실 만한 것을 찾으려던 참입니다.”
“도망간다고 해서 화났나?”
올려다보는 눈은 다시 싱글 웃고 있다. 정말 달아나고 싶을 만큼 사람 마음을 흔들던 슬픈 것들은 한 점도 없이. 어떻게 해도 결국 이 사람에게는 속을 다 뒤집혀 보이는 기분이 들어 육손은 정말로 화가 날 것 같았다. 찾아낸 이불을 적당히 아무렇게나 펄럭여 덮어주고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만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자꾸 등 돌리지 말래도.”
“주무십시오.”
“죽을 만큼 아파보지 않고서는 살아봤다고 할 수가 없는 거라고, 알아, 백언?”
궤변 따위 늘어놓을 여력이 있으면 주무십시오-라고 야멸차게 대꾸하지 못한 것은 무례한 언사라는 자각 때문. 아픈 사람이고 연상이고 상관이니 한번은 더 참아 줄 수 있지 않냐고 스스로를 다잡는 사이 여범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자네에게도 이런 상처가 생기길 빌어주지.
“심사가 편치 않으신 것 같으니 악담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악담이라니. 진심어린 기원을 그렇게 내치면 섭하지.”
정말 상처받은 것처럼 풀 죽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단호하게 잘라 말해주려고 돌아섰다. 그러나 여범이 더 빨랐다.
“차근차근 계획대로 조심조심 사는 걸 나쁘다고는 말 못하지만, 한 번 정도는 미친 척 부서지고 깨져보라고. 이거라면 죽어도 후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상처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게 살맛나니까.”
“사는 게 밥입니까. 맛이 나고 안 나고를 따지게.”
어쩔 수 없이 볼멘소리가 나와 버렸다. 훈계를 들은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은 아니다. 미숙하고 경험도 얕다. 그러니 배울 것은 많고 충고는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것은 명백한 간섭이다. 사는 방법 따위를 가르치려 드는 것만큼 성가시고 애매한 주제에 잘 떨쳐지지 않는 간섭도 있을까.
제대로 걸려들고 말았다는 생각에 우울한 육손과는 달리 여범 쪽은 즐거운 듯 웃었다.
“따지지 않을 수가 있나. 딱 한 번 밖에 안차려지는 귀한 상인데 꾸역꾸역 먹어치우는 건 서글프잖아.”
“꾸역꾸역 해치우고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말하는 대신 지긋이 바라보기만 한다. 그렇지 않아도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후회하고 있던 참이라 열 마디 말보다도 그쪽이 더 불편해 육손은 예를 취하고 서둘러 나와 버렸다.
평소와는 달리 거칠게 젖혀진 취렴翠簾 너머로 멀어지는 그림자를 보던 여범이 고개를 돌리려다가 온몸으로 전해지는 격통激痛에 저절로 새어나오는 신음을 씹어 삼켰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그럼 좀 더 좋은 얼굴을 해보라고.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그런 얼굴을 하고 다니면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있겠어?”
이미 들리지 않을 거리로 달아나듯 멀어져 버렸을 상대에게 더 타박을 늘어놓는 대신 여범은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어린 녀석들이 그런 얼굴 하고 있는 것만큼 봐주기 어려운 것은 없다. 아버지를 잃고 세력을 잃고 혼자가 되어서 악만 남아 있던 어린 녀석에게 걸려든 것도 따지고 보면 그래서였겠지.
“그때는 나도 젊었으니까.”
그리고 대단한 바보였고. 정말이지 따라나선 이래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넘치는 건 혈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모자란 건 혈기 말고는 전부였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제법 무언가를 이뤄놓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만큼은 되었는데. 그때 꾸었던 꿈과는 아직도 하냥 멀기만 하지만.
“아십니까, 주군? 제일 나쁜 주군은 폭군도 암군도 아니란 말입니다.”
어이없을 만큼 훌쩍 가버리는 당신 같은 주군이 제일 나쁩니다.
이뤄야 할 건 잔뜩 남겨놓고서, 미칠 만큼 반하게 했던 반짝임은 지워주지도 않고서. 그리고 자기만 쏙 빠져버리다니. 이렇게 비겁하고 치사한 경우를 당할 줄 알았으면 당신을 따라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니까. 되돌리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내 선택이 아니라 그날 당신의 행보겠지요.
그러니 하루쯤은 주군 생각에 이렇게 늘어져 있어도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내일부터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갈 겁니다. 주군 덕분에 생긴 이 상처가 그렇게 살라고 등을 떠밀어 대는 통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고 싶어도 그러지 못 할 겁니다.
원망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할 일이지요. 이만한 상처가 살아있다 아프게 되새겨주지 않으면 이런 세상에서 흐르는 대로 흘러가고 쓸려가는 대로 쓸려가 버릴 겁니다.
“그러니까 악담이 아니라구, 백언.”
아무 것도 품지 않고 숨만 쉬는 것보다는, 이런 상처라도 가지고 버둥대는 편이 훨씬 사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당시 태비가 강도江都에 있었는데 손책은 여범을 보내 맞이하도록 했다
서주목 도겸이 여범은 원씨袁氏를 위해 정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현의 관리에게 여범을 고문하여 취조하도록 지시했다
여범이 신임하는 식객 가운데 건장한 자들이 그를 빼내 돌아왔다
당시 여범과 손하孫河만이 항상 손책을 수행하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상당한 고생을 하였으며 위험하고 험난한 상황에서도 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