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실내는 무겁게 깔린 향연香煙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여명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는 눅진한 어둠 속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두 아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익숙하고 오래된 친구의 동생들. 그 중 하나, 이제는 주군이 된 사람이 향하고 있는 곳을 보았다. 모셔진 것은 이름자가 새겨진 위패. 누구의 이름이 쓰여 있는지 글자를 더듬어 읽을 필요도 없었으나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성큼 성큼 나서 빛을 가리고 있는 휘장을 잡아채듯 걷어냈다. 방안에 밀어닥치는 빛 안에서 이전의 아이가, 지금의 주군이 이편을 보았다.
“중형!”
고뇌와 불안을 신중함과 명민함이라 애써 변명하는 얼굴은 불과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시종의 말대로 밤을 꼬박 새운 듯이 눈가에는 그늘이 두드러졌다. 이해가 가는 반응이다. 젊다기보다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형님의 기업을 이어나갈 수 있느냐는 기로에 서서 결정을 내려야 할 위치로 내몰렸으니.
내민 것은 죽간에 쓰인 서찰. ‘중원’과 동떨어져 예가 부족하다 무시당하는 곳이 초楚땅이다. 그러나 그리 예를 아는 자라면, 마땅히 한 세력의 장에게 보내는 친서는 비단에 배접한 격식을 따라야 할 것임에도 보내온 것은 휘하에게 내리는 명령서에 쓰일 법한 죽간. 읽어보지 않아도 하려는 말은 알 수 있어 주유는 손에 쥔 대나무 조각을 잡아 흩었다. 맥없이 떨어져 나간 조각에 담아 보낸 뜻 역시 손끝에서 내쳐져 발치에 나뒹굴었다.
바라보는 주군의 눈이 의문을 던졌다. 결국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 한 것이다. 밤새워 꼬박 고민했음에도 판단을 묻고 있는 것인가.
고민하는 것 역시 재능이라 말했었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앞서나가는 그는, 기특하다는 듯이 아우에 대해 말하면서, 동생 앞에서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자랑스러운 빛을 얼굴 가득 담은 채로. 그래서 엉덩이가 무거운 편이지만 이 형이 냅다 걷어차 주면 어디든 군말 않고 갈 녀석이니까-라고.
주군이 아버지와 형의 후광을 벗어나고 싶어 애쓰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와는 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리하는 면이 분명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어린 날 형의 등을 보며 따라가기만 하면 되던 그때와는 달라졌으니까. 그러나 결국 밤새워 길을 고민한 곳은 두 사람의 위패 앞. 그러리라 짐작했던 그 범위 안의 행동이라는 것에 연민 섞인 안도와 함께 불현듯 뜨거운 것이 속에서 움직였다. 대체 두 사람을 앞에 두고서 번민할 여지가 있기나 하단 말인가. 처음부터 답은 이미 하나로 정해진 것이었는데.
손을 뻗어 활을 집어 들었다. 손안에 감기는 시위가 메말라 있다. 현을 튕기자 뽀얀 먼지가 빛 속에서 부서져 나간다.
“한참 쓰지 않으셨군요.”
강과 호수를 끼고 있는 숲은 안개가 짙었다. 제법 그늘 깊은 숲 사이에 숨은 거대한 짐승을 향해 주군이 홀로 말을 달렸다. 주저하는 마음을 떨쳐내듯 말을 거센 기세로 몰아나가는 주군을 안개가 삼켰다.
큰 맹수가 사는 숲은 오히려 고요하다. 주위를 감싼 안개는 시야와 함께 소리를 차단시켜 물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공간을 혼자 달려가 눈앞에서 지운 듯 사라져 버리는 사람의 뒷모습.
그만-.
스스로의 생각을 끊어내려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이제는, 적어도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맹수의 기척 때문인지 불안해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독였다. 말이 불안해하는 것은 호랑이 때문이 아니라 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어서일지도 모른다. 안개 너머에서 말울음 소리가 길게 울었다. 절박한 울음에 호위들이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을 손을 들어 제지했다. 주춤하면서도 호위들은 그대로 대기했다. 다시 불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람이란, 이와 같을 수 있는 것이다. 떠올리고서는 싸울 수도 움직일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순간을 고스란히 눈앞에 재현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것처럼 아프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버텨낼 수 있다.
그렇게 살아내야 하니까. 너를 대신해서.
화살 한 대만을 건네고 홀로 가라 한 것은 신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고민은 이제 끝내야 할 시간이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시작하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남이 들려주는 답으로는 되지 않는다. 자신이 답을 찾아내고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한다. 그러니, 너라면 마땅히 이렇게 했을 것이다.
안개 속에서 짐승의 단말마가 울렸다. 숨을 죽이고 있던 새들이 일시에 날아올라 침묵은 부서져 나갔다. 호위들이 눈치를 보며 주군에게 달려가려 조바심쳤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안개 너머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안개를 한 꺼풀 열어젖혔다. 아직 겹겹이 드리운 두터운 휘장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간절한 기원이 솟아 축축해진 손을 힘주어 쥐었다.
돌아와. 아무 일 없던 듯이 무사히. 이런 일로 무얼 그리 속을 끓였느냐 웃어주면서.
안개를 지나 나타난 사람의 모습이 온전히 눈에 들어오자 기원은 그쳤다. 모습을 보고서야 심장이 속삭였다. 그런 바람은 헛된 것이었노라고.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아무리 빌어본들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라고.
아픔을 감추려 웃음 지었다.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익숙해진 가면으로 주군을 보았다. 손에는 빈 활을 들고 걸음은 아직 떨림을 완전히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올려다보는 눈에는 더 이상 한 점의 오뇌도 없었다.
“항복을 논하는 자, 이와 같이 될 것이다!”
금입사 아로새긴 검날이 붉고 검은 칠 된 서안 모서리를 베어냈다. 짙은 안개도 번민과 함께 걷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민 손에 보검의 무게가 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