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1막

+ 앞의 글

[Don Carlo] -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돈 카를로 5막과 4막의 가장 큰 차이는 1막이 퐁텐블로 숲에서 시작하는가 아니면 이걸 생략하고 바로 산 유스테 수도원에서 시작하느냐다. 퐁텐블로 숲에서 길을 잃은 엘리자베타가 카를로를 만나고 두 사람이 정략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지는 동화같은 로맨스는 희곡에는 없는 부분. 난 오페라냐 희곡이냐를 선택하라면 희곡을 택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퐁텐블로가 싫다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좋아함. 

시종일관 칙칙하고 무거운 이 오페라에 유일하게 얹어놓은 자그마한 설탕장식이라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 우선은 엘리자베타와의 이별을 카를로의 노래로 들려주는 4막에 비해서 어떻게 만나고 사랑에 빠졌으며 그럼에도 왜 헤어져 어떻게 아파했는지 직접 보여주는 5막 쪽이 감정이입이 낫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고 4막 버전에서는 드러날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엘리자베타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라는 게 두번째 이유다. 더불어 엘리자베타와 카를로의 성격과 성숙함의 차이도 비교가 되고. 

앞선 포스팅에서도 말했지만 13잘츠는 다른 이탈리아어 5막에서도 생략되는 부분들을 넣었기 때문에 막이 오르자마자 등장하는 건 사냥에 나선 엘리자베타나 숲에서 혼자 노래하는 카를로가 아니라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이다. 레미즈의 At the end of the day의 16세기 버전이랄까. 아무래도 오페라라서 레미즈만큼 밑바닥을 맨 손톱으로 긁어내는 절절함은 덜한 상대적으로 우아한 합창이지만 사실 16세기 프랑스 상황은 300년 뒤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는 게 슬픈 사실.

이런 고통의 원인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 이게 엉뚱하게도 이탈리아 지배권을 놓고 싸웠던 거. 르네상스 이후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힘을 잃어가는 이탈리아를 스페인이랑 프랑스가 서로 지배하겠다고 나섰던 건데-이탈리아 사람인 베르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이 부분을 작곡했으려나 궁금해지지만- 펠리페 당대에 시작한 전쟁도 아니고 거슬러 올라가면 60여년을 이어진 전쟁이었다.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니 백성들에게는 먼 영광인데 그 고통은 가까운 거라 전장으로 떠나 돌아올 기약 없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전쟁에서 아들을 모두 잃은 홀어머니의 슬픔도 나온다. 그런 슬픔은 아랑곳 없이 사냥을 떠나는 왕의 일행을 보던 백성들이 찾는 건 왕의 딸, 엘리자베타. 

금붙이를 건네며 스페인의 사절이 왔으니 평화조약이 체결될 거라고 이제 안심하라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엘리자베타의 모습은  클리셰 수준인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공주님의 모습이지만 소녀처럼 천진하게 백성들의 괴로움은 모른채 사냥을 하는 버전과는 다른 이미지를 여기서부터 심어주게 된다. 

반면에 카를로는 아버지 펠리페 몰래 사절단에 숨어들어서 프랑스에 왔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온 목적은 약혼녀 엘리자베타 보려고. 더해서 아빠 싫어서 나온 것도 있기는 있지만. 좋게 말해서 순수하고 낭만적인 왕자님인거고 솔직히 말해 생각없음의 싹수가 벌써부터 보인다. 스페인이 이겼으니까 별 생각 없이 기분 좋겠지하고 봐주려고 해도 그러니까 다 이긴 전쟁 협상자리에 아버지는 이렇게 장성한 아들을 사절단에 끼워주지도 않고 프랑스도 가지 말라고 했겠지... 

그와는 별개로 백성들을 위로하느라 일행을 놓치고 길을 잃은 엘리자베타와 카를로가 만나서 풋풋하게 서로를 탐색하고 엘리자베타도 소녀다운 소망, 낯선 나라로 시집가지만 그래도 상대와는 서로 사랑했으면 하는 꿈을 털어놓고 카를로는 의뭉스럽게 왕자는 당신을 사랑할거라고 확신하면서 자신의 초상화를 내미는 깜찍스러운 고백을 하는 부분은 귀엽긴 함. 카를로가 엘리자베타를 위해서 모닥불을 피우면서 군대 있을 때 이런 식으로 불피웠다 은근히 남자다움을 자랑하는 것도 귀엽게 봐주면 된다.

왜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고 있을 수 있냐하면 성으로 사람을 부르러 갔던 시종 테발도가 엘리자베타의 결혼 상대가 카를로가 아니라 그 아버지인 스페인의 왕 펠리페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때문에. 펠리페를 대신해서 온 레르마는 강화조건은 그렇지만 그럼에도 펠리페는 공주의 자유로운 의사로 결정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엘리자베타의 의향을 묻는다.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보는 카를로의 기대와는 달리 엘리자베타는 평화를 바라는 백성들의 애원에 펠리페와의 결혼을 받아들인다. 따지고 보면 여기서 엘리자베타가 안 하겠다고 안 할 수 있었던 결혼이었겠냐만은 펠리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를 줬으니까 엘리자베타의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한 욕심은 아닐 수도 있는 게 이렇게 깔리는 것. 엘리자베타가 개인적인 욕망은 분명히 있음에도 자신의 의무를 알고 거기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기서 확실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이런 엘리자베타의 모습은 이후 카를로가 자신의 욕망과 감정때문에 의무를 버리는 모습과 대비가 된다. 

이제 평화가 왔다는 기쁨의 합창 속에서 여왕의 신분으로 올려진 엘리자베타와 약혼녀를 새어머니로 맞게 된 카를로가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괴로워하고 가마에 올려진 엘리자베타가 카를로에게 손을 뻗으면서 궁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공적으로는 최고의 영광을 입는 순간이 사적으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이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데 시몬 보카네그라의 프롤로그에서도 같은 대비가 쓰였다. 참 전통적인 장치인데 베르디가 이런 거 잘 쓰는 거 보고 있으면 이러면 내 얘기 잘 따라오겠니?하고 물어보는 것 같아서 되게 친절하고 좋은 분이라는 호감이 쑥쑥 들더라고.

카를로역의 카우프만은 잘 생긴데다가-덕분에 카를로 욕하려다가 카우프만이 노래하거나 연기하는 거 보고 있으면 말을 좀 곱게 고르게 되는 효과가 있다- 천진하게 굴 때는 제법 소년답고, 엘리자베타역의 하르테로스는 첫 인상이 하우스의 커디 원장이랑 닮아서 저 분은 좋은 관리자왕비님이 되겠구나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우아한 분위기. 

이하 역사랑 희곡 등등을 동반한 잡담 

-. 1막의 평화조약은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1559년 4월 체결되었다. 겨울이라며 춥다며 4월이야?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나라도 4월에는 눈이 내리기도 하니까... 거기다가 이때 기후는 추웠을지도. 실제와는 별개로 퐁텐블로가 눈을 연상시키는 연출은 어느 버전이든 좋다. 절망한 카를로 위로 눈이 내리는 것도 좋고 5막에 엘리자베타가 행복했던 단 하루를 다시금 떠올릴 때 눈이 내리는 연출도 좋고. 

아무튼 이때 협상단의 대표로 가서 펠리페와 엘리자베타의 결혼을 포함한 사항을 진행했던 사람은 오페라처럼 레르마 백작이 아니라 알바 공작. 카를 5세 시절부터 활약한 알바는 펠리페에게도 대를 이어 죽을 때까지 유용하게 쓰이는데 실러의 희곡에서는 이 알바 공작이 중요한 방해자이자 음모자로 등장한다. 펠리페의 고해신부인 도밍고와 함께 엘리자베타에 대한 펠리페의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 카를로와 펠리페의 사이를 갈라놓는데 큰 공헌을 하면서 로드리고의 새로운 사상을 위험하게 여기는 구질서의 수호자인데 오페라에서는 둘 다 생략되어서 좀 아쉽다. 가뜩이나 긴데 악역 둘이 더해지면 스토리가 더 복잡해졌을거고 펠리페의 고독한 권위도 약해졌을 거고 아마도 바리톤이나 베이스로 등장해야 했을 테니 더 이상 저음역을 늘리는 건 무리라 생략될 수 밖에 없었겠지만 둘이 듀엣으로, 이왕이면 대심문관까지 셋이서 스페인판 역사는 승리자의 것 같은 거 불러줬음 좋았을텐데...

-.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된 1559년 펠리페는 사실 32세 밖에 안 된 나름 청년이었고, 엘리자베타는 14세였다. 카를로는 엘리자베타와 동갑으로 14세. 그렇다고 위의 저 분들이 열네살 소년소녀를 연기하는 거냐 하면 그건 아니고 오페라에서는 분명한 시점과 나이가 나와 있는건 아니니까 그냥 보이는대로 보면 됨. 실제로 10대의 천진한 소년 카를로를 요구한 연출도 있긴 있는데 그 버전은 여러가지로 특이하니까 다음 기회에 얘기하고... 

아무튼 지금 기준으로는 은팔찌를 예물로 건네야 할 결혼이지만 16세기 왕가의 결혼식으로는 무리한 결혼은 아니었다. 프랑스 입장에서도 언제 자랄지, 무사히 자라기는 할지, 왕위에 오르기는 할지 알 수 없는 어린 왕자를 사위로 맞이하는 것보다는 지금 현재 창창한 왕을 사위로 맞는 편이 유리했을 것. 엘리자베타도 펠리페도 후계자 생산이 충분히 가능한 나이였고 카를로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좋은 후계자감이 아니었던 조건까지 고려한다면 프랑스가 미래 스페인왕의 외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엘리자베타와 펠리페의 결합 쪽이 훨씬 이득이었다. 물론 펠리페도 후계자 하나 있는 게 영 미덥지 않았고 두번째 결혼한 영국의 메리 1세와의 사이에서도 아들을 얻지 못 했으니 아들의 약혼자였다고 굳이 양보할 이유는 없었을 것. 32살이면 손주로 후계자를 세울 생각보다는 아들을 하나 더 볼 생각을 하는 쪽이 자연스러우니까 실제로는 노인의 탐욕 그런 게 아님. 하지만 실러는 의도적으로 40대인 펠리페의 나이를 60대로 확 올려버렸고 덕분에 오페라에서도 펠리페는 노인의 괴로움을 말하게 되었다.

이런 나이 조정이 있다보니 카를로 입장에서는 엘리자베타가 새어머니가 된 것은 단순히 약혼녀를 빼앗긴 실연의 충격뿐만이 아니라 이제와서 자신 아닌 다른 후계가 가능해졌다는 정치적인 충격도 함께 받는 것. 펠리페가 엘리자베타와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그리는 미래에는 카를로의 자리는 없는 거니까. 희곡에서는 카를로가 자신을 떠보는 도밍고에게 새어머니가 공주들을 낳았으니 앞으로 내가 어찌될지 알겠느냐며 말을 돌리는 것도 그런 사실의 반영이지만 희곡에서도 오페라에서도 카를로는 여기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을 안 하고 덕분에 아버지에게 왕관 맡겨놓은 것 처럼 굴다가 사고를 치고 만다 ( mm

-. 카를로가 군대 있을때 배웠다고 엘리자베타한테 불 피워주는 거 귀엽게 보고 있으면 된다는 건, 실제 역사상의 카를로는 군대 보내놨더니 적군 쪽으로 도망가려고 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저지른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어서 사실 오페라의 카를로나 그 원작인 희곡의 카를로는 역사와는 별개인 창작인물로 보는 게 몰입에 좋다. 그러나 실러는 성격은 전혀 다른 인물로 그리면서도 또 실제의 카를로가 했던 일들-알바 공작에게 결투를 신청한다거나 플랑드르 문제에 관여한다거나 알칼라 대학에서 심한 병을 앓았다거나 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잘 버무려놔서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게 사실.

+ 이어지는 글

[Don Carlo] -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2막 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