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강의 자는 계녕이며 오군 오 사람이다. 조부는 속이며 독행전에 실려있고 아버지는 襃라는 이름인데 포라고 읽어야 할지 부라고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튼 아버지는 지조가 있었으며 계속해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되어있다.
독행전에는 육강의 조부 속과 육속의 조부인 육굉에 대해서 실려있는데 육굉은 건무 연간에 상서령을 지냈고 용모가 옥과 같았고 대대로 세족이었다-라고 되어있는 걸 보면 이미 후한초기에 오군에 안정된 기반을 마련해놓고 중앙에 진출한 호족이라서 원씨만큼은 아니라도 평화로운 시대였으면 오래오래 별 탈 없이 잘 살았을 집안이라는 걸 보여준다.
백중숙계-의 순서에 따르면 육강은 위로 형이 있었을 거고, 육손의 할아버지인 우紆 의 자가 숙반叔盤이니 육강 바로 위의 형일 수 있겠다. 바로 위 형네 손자라고 생각하니 괜히 더 귀여워했을 것 같잖아.
이 아래부터가 헤매다가 던져놓은 부분. 육강은 어려서 군의 벼슬에 임관했는데 이로서 의롭고 절개가 있다고 칭찬받았다. 수령이 새로 부임해서 백성들을 성곽수리 부역에 동원했는데 육강이 와서 이를 면해주자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고 도둑도 그쳐 주와 군에서 표를 올려 칭찬했고 광화 원년(178년)에 무릉태수가 되었다가 계양, 낙안태수가 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해석 엉망인데 ...군에 벼슬을 했던게 왜 칭찬받을 일인지는 모르겠다. 중앙으로 안 나가고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고향에서 시작해서? 아니면 군에서 벼슬을 했는데 의롭게 잘 했다는 의미인가. 아무래도 기반이 인근에 있는 호족이니 그랬겠지만, 나쁜 목민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부임지가 거의 남쪽이라서 역시 중원이 혼란해지자 그제서야 남으로 피난 온 세력은 물론이고 손견쯤 가서야 입신 루트 시작하는 손씨와는 영향력이 다르기는 했겠지 싶다.
이렇게 시달리고 있을때 마침 여강에 강하만이와 손을 잡은 도적이 들고 일어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여강태수로 명받아 도적을 격파하고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는 기뻐하며 육강의 손자 상에게 낭중 벼슬을 내린다.
육강의 마지막 부임지인 여강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손자의 존재에 더 시선이 간다. 얼마전까지 불경하네 신하 주제에 망국 운운했네 까여서 벼슬 떨어질 위기까지 갔다가 십여만명이 들고 일어나 4개 현을 함락시킨 도적을 물리쳤으니 조정에서 상이 내려온다는 것은 그럴 법한테 아들도 아니고 손자에게 벼슬이 내려졌다는 것은 흥미롭다. 육적의 나이를 계산해봐도, 이후 육적의 자손에 대한 기록을 봐도 육강의 손자 상은 육적의 아들은 아니다. 그럼 육강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고 벼슬이 아들에게 가지 않고 손자에게 갔다는 것은 이미 아들은 벼슬을 가지고 있을만큼, 손자를 낳을만큼 장성해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아들과 손자는 어디로 가고 열몇살된 육손이 가문을 책임지게 되었을까.
<獻帝>卽位, 天下大亂, <康>蒙險遣孝廉計吏奉貢朝廷, 詔書策勞, 加忠義將軍, 秩中二千石.
헌제가 즉위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육강은 블라블라해서 충의장군을 더하고 중이천석이 되었다. 손견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원술의 명을 받아 형주일대를 정리하는 수고를 하고 반동탁연합에서 화웅을 베고 선봉에 나서는 수고를 해가면서 장군직에 오른 것에 비해 육강은 그렇게 다이나믹한 공훈을 세운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것보다도 누구한테 어떤 조정에 봉공을 했다는 건지가 궁금해진다. 친동탁이었나? 이곽? 유랑하던 헌제? 아님 그냥 한 황실의 충신?
원술이 수춘에서 병사를 기르면서 부곡이 굶주리자 쌀 좀 내놔봐 무기랑 갑옷도 내놔봐 하고 찌르자 육강은 문을 걸어잠그고 안으로는 전쟁에 대비하고 장수들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했고 원술이 열받아서 손책을 보내서 육강을 공격하게 하자....이후는 삼국지에 실려있는 바와 같다. 결국 적을 맞아들인지 2년만에 성이 함락당했고 패한지 한달 남짓한 기간 안에 육강은 병들어 죽었다. 향년 70세.
삼국지에는 여강이 금방 함락당한 것처럼 그려져있는데 2년이면 굉장한 소모전이다. 성 하나로 2년을 그것도 손책한테 버틸 수 있다는 것으로도 대단하다 싶을 정도. 그렇게 피같은 2년을 삽질해서 함락시켰는데 원술이 약속을 또 깨고 엉뚱한 놈에게 여강을 줬으니 손책으로서는 정말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원술도 먹고 살 것도 없는데 무조건 쌀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육강은 여강에서 단순히 좋은 고장 만들기 이상의 것을 대비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원술의 찔러보기는 미리 견제해놓는 수단이었을 수 있고 손책이 여강 침공 전에 육강을 찾아갔던 것도 단순히 선대의 인연때문만이 아니라 육강이 대비해놓은 것을 두고 어떤 딜을 제시했을 수 있겠지...그런데 2년 버틸 정도면 육강 눈에는 손책은 정말 아니었나보다. 장래를 두고 맡길 주군인가라고 했을때 손책이 당장의 영광은 상상이상으로 찬란하게 함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손만대 그 땅에서 잘 보존해줄 사람은 아니고, 황제 뿐아니라 자신의 땅과 그 기반에도 충성을 바치는 호족입장에서는 그럼 두 팔 벌려 환영할 주군은 아니겠지.
사망 당시 70세라면 앞에서 이야기한, 육적 위로 장성한 아들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데 거기에 이번에는 아들 준이 낭중에 봉해졌다고 되어있다. 그러니 육적은 자기 위로 한 명 이상의 형과 어쩌면 자기보다도 연상이었을 수도 있는 조카도 있었다는 이야기. 이런 장성한 아들 손자들이 2년의 소모전과 흩어지고 굶주리는 재액을 거치면서 모두 죽고 결국 열네살의 육손이 살아남은 사내아이 중의 연장자가 되어서 집안을 책임졌다-라고 생각하면 새삼 육손의 어린 시절도 참 어지간했겠구나 싶다. 더구나 이미 한 번 아버지를 잃고 더부살이하러간 친척집에서 또 한번 피난을 해야했으니.
宗族百餘人, 遭離飢戹, 死者將半. 朝廷愍其守節, 拜子<儁>爲郞中.
(육강이 죽고난 뒤) 종족 백여명은 흩어지고 굶주리는 재액을 당해 죽은 자가 거의 반에 달했다. 조정에서는 그 절개를 가엾게 여겨 아들 준을 낭중에 봉하였다.
삼국지에는 원술이 공격하려하자 육적과 육손을 피난 시켰다고 되어있으니 비전투원은 고향으로 보내고 2년의 싸움을 치르고도 남은 일족이 일백여명이면 그 가문의 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흩어지고 굶주려서 죽은 자가 거의 반에 이르렀다라면 참혹한 일이다. 사후 난민의 처리는 점령군 수장이 민생안정 차원에서라도 신경을 썼던 다른 사례에 비한다면 육씨 일족의 혹독한 재액은 다분히 의도적인 핍박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이건 완전히 손책 때문이다, 손책을 공격하자-라고 하기에는 살짝 애매한게 손책이 육씨 집안 사람들을 묶어다가 목을 친 것도 아니고 함락 후에 여강의 책임자로 부임했던 것도 아니라서 적극적으로 이 집안 사람들 잘 모셔다가 무사히 귀향열차 태워줍시다 하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려고 들면 적어도 대대로 지방 호족이던 일족이 난민으로 흩어져 굶주려서 절반이 죽어갈 지경까지는 가지 않도록 막거나 신경을 써줄 수도 있기는 있었겠지. 음, 숼드가 어려운 사안이기는 하다. 의도적으로 밟았을 가능성이 농후한 원술에게 책임을 지워주려고 해도 아무튼 이미 육강에게 모욕당한 악감정이 있었다-는 기록까지 있고 보면 더더욱. 그래서 손권이 자기 딸 두고도 굳이 형의 딸을 육손에게 짝지워줬겠지.
육손은 이렇게 절반만 남은 사람들을 거둬가며 집안을 지켰을텐데, 2년간의 소모전을 치를때 여강에 비축해놓은 물자만으로 버틴게 아니라 본가에서도 뭔가 조달했다고 한다면 본가의 살림규모도 말이 아니었을거다. 본가의 재산은 소모전에 건드리지 않았다고 해도 난민이 되다시피한 일가를 거둬 먹고 살게 하려면... 열네살짜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난 초반의 손권과 육손은 정말 좋은 군신관계였을거라고, 그러니까 적어도 손권 입장에서는 육손을 좋게 봤을 거라고 생각하는게 육손이 맡았던 엄청난 짐이나 손권 자신이 부담해야했던 짐이나 비슷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신하들 중에서 육손만큼 손권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도 없다. 제갈근은 전란에 근거지를 잃었지만 책임져야 할 것은 그만큼 크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쿨하다면 쿨한 제갈가의 이 생존 전략을 나는 좋아하지만 그건 별개의 일이고 제갈근이 제갈가를 부흥시켜야해!라는 사명에 눌려있지는 않았잖나. 능통은 아버지를 잃었지만 복수 외에는 자기 이외의 무언가를 책임지는 압박을 받지는 않았다. 주연은 오히려 부모를 잃었지만 다른 보호자를 잘 만난 쪽이다. 노숙은 자기가 걷어차고/들어먹고 나온 사람이니 손권으로서는 부러웠을거고 주유는 명문가의 자손이지만 이미 손책과 만난 시점에서 그걸 버린거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본인도 (아마도) 원하지 않았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짐을 지고 그걸 어떻게든 끌어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손권은 육손이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물론 명성이 자자한 당숙에 대한 컴플렉스는 없었을 육손과는 달리 손권 자신은 잘난 형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고 그게 결국에는 좋지 않은 곳을 스쳐서...
육손의 입장도 그렇지만 시집왔을 손책딸도 그런게 여강때 싸우다 죽거나 굶어죽거나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 틈새에서 살려면 쉽지 않았겠지. 제사라도 지낼라치면...;;; 거기다 육적의 형수라든가 어머니라든가 하는 남겨진 여자들을 생각하면...확실히 이 결혼은 무섭다. 유비와 손권 누이와의 결혼은 그래도 대등한 입장이었고 결혼 후에도 손부인이 기가 눌려서 지냈던 것 같지는 않고 거기다 금방 끝났지만, 손책딸은 육손과 30년 플러스 마이너스 알파, 거기다 육손 사후에도 이혼한 며느리가 두고 간 손자까지 길러가면서 살았으니 부부 사이가 꿀같았다고 해도 편하지 않았을 삶이다. 손권 대체 형 딸한테 무슨 짓을 한거냐. 가뜩이나 아빠 얼굴도 모르고 자랐을 애한테.
작은아들(막내아들)인 적은 오에 사관하여 울림태수가 되었고 박학하고 선정을 베풀어 당시에 칭송 받았고 어릴때 원술한테 귤을 품어오다 떨어뜨린 일로 명성을 얻었다.
육적 앞에 굳이 작은아들/막내아들이라고 표시를 해주고 있어서 슬프다. 위로 누군가 더 있었는데 결국 막내만 남았다니.
손책이 본격적으로 강남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때 오군의 명사들을 자리에 모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육손이 아니라 육적이 나갔다. 회귤의 일로 명성이 있었지만 아무튼 어린애였기 때문에 말석을 주었는데 자리나 채우고 방명록에 서명이나 하고 나오면 충분했을 그 자리에서 군자는 무력이 아니라 인의로서 천하를 다스려야한다는 소리를 해서 사람들이 놀라 돌아보게 했을때 소년의 심정이란. 장성한 형과 조카가 살아있었다면 마땅히 오군의 중심으로 나섰을 자리에 어린 자기가 가문을 대표해 나가 말석에 앉아야했던 기분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세상모르는 어린애의 철없는 소리로는 안 들리는 거다. 오히려 무모하게 뼈있는 말을 던진게 되니까. 이후 울림으로 내쳐지다시피 내려가게 된 그 모난 성정도 다 유년기때의 상처에서 비롯된거라 쉴드라도 쳐주고 싶어지지 않나.
육강의 아들과 손자가 반드시 여강함락 때나 혹은 그 이후에 일가가 고단했던 시절에 죽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여강이 평온했거나 어떤 식으로는 손책의 적이 되지 않는 입장으로 갔더라면 역사에는 더 많은 육씨들이 남아있었을 것이고, 오의 운명도 상당히 달라졌을거다. 그리고 어쩌면 육손은 역사에는 나올 일 없이 오군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살다가 조용히 평온하게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겠지.
뱀발
육손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독행전도 재미있으니 이건 따로 접었다
육손의 6대조-맞나?-가 되는 육굉의 외모가 정말 표준 이상으로 준수하기는 했던 모양인지 팔가주 후한서 독행전의 주석들 중에는 옥과 같은 용모, 잘 생겼음을 넘어서 광무제가 보고는 남쪽에는 정말 가인이 많구나-라고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뭐 이런 걸로 역사에 남다니;; 역시 미인의 고장 강남.
육굉이 평소에 월포로 지은 홑옷을 입고 다니기를 즐기자 황제가 그걸 보고 좋아해서 회계군에서 월포를 진상하게 되었다는, 회계군 입장에서는 흥한건지 망한건지 알 수 없는 기록은 주석마다 공통적으로 들어가있다. 전에는 진상 안 하던 물목이었는데 진상하게 되었으니 망했다고도 볼 수 있고 반대로 촉금 수준의 명품도 아니라서 전에는 진상도 안 했던 월포가 황제가 직접 구하는 진상품으로 격이 올랐으니 덩달아 사려는 상류층의 수요도 늘어나 관련 산업이 번성했을 수도 있겠지. 커런트 레드의 판매량 진작을 위해 몸소 드레스를 입고 홍보겸 판촉에 나섰던 칼바니아의 여공작이 생각나기도 한다. 잘 생기기만 한게 아니라 부지런하고 친절하고 덕도 있고 총명하고 학문도 좋아했다는 설명도 있기는 있는데 아무래도 외모 이외의 부분은 부수적으로 실려있는 기분. 주도독의 有姿貌 세 글자에 허덕이다가 歎曰 南方固多佳人같은 걸 보고 있으니 재미있다. 공주와의 혼담도 오갔던, 황제가 감탄할 정도로 잘 생긴 상서령 이런거 상상하면 시대물 덕후로서는 훈훈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겠다. 몇대를 걸쳐 그 유전자가 육손의 대까지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소설에 나와도 작가 설정 심하네ㅋ 웃었을만큼 화려한 육굉에 비해서 육손에게는 고조부가 되는 육속의 기록은 수수한 편이다. 처음 군의 호조사로 일을 맡았을때 흉년이 들자 태수의 명을 받아 구호가 필요한 백성들의 장부를 작성할 때 성과 이름을 각기 구분해서 기록한 육백여명의 결과에 착오가 없어서 태수가 이를 기특하게 여겼다-는 꼼꼼한 행정관의 면모를 보여주는 기록이 우선 있다.
이렇게 출발은 잘 했는데 역모에 휘말려서 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가 낙양까지 올라와 사식을 넣어주었다고. 사식을 받아든 육속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가 오셨구나하고 흐느꼈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해줬는데 어떻게 어머니가 오신 줄 알았냐 묻자 어머니가 국을 끓일 때 고기는 반듯하게 썰지 않은 것이 없고 파는 모두 같은 크기로 가지런하게 썰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건 엄마 국이 맞음ㅠㅠ하고 울었다는 기록.
좀 서글퍼지는 기록이지만 여기서도 음식이 정갈했을만큼 법도가 있는 집안이었다, 지방에서 상경할 수 있을만큼,고깃국을 끓일만큼의 경제력도 있던 집안이었다라고 짐작해볼 수 있겠다. 특히 국이야기는 이 집안 며느리와 딸들에게 대대로 전해졌을법한 에피소드라서 시집온 손책 딸이 웃어른들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릉때 국도 끓이고 속도 끓이고 있다거나...물론 본인이 손수 집안일 안 했을 수도 있겠지만.
육속은 결국 이 사건으로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큰 아들은 광릉태수, 둘째 아들은 낙안태수에 이르렀고 막내아들은 고향에서 머물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는데도 그 아들인 육우와 육강이 각각 성문교위와 태수직에 올랐던 것을 보면 이 일로 집안이 몰락하거나 하지는 않고 세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육굉에 관한 주석은 인터넷으로 구한 팔가주 후한서에는 있는데 링크해 놓은 웹문서에는 없는 주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