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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Miserables

대의원 선거

neige 2011. 9. 27. 23:10


그는 사무용 책상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는 몇 장의 지폐와 그해에 선거-아라스에서 있었던 대의원 선거-하러 갈 때 사용했던 통행증이 들어 있었다.


레미제라블 1부에서 마들렌느로 살아온 발장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무죄한 샹마띠외를 구하러 가야하나 고뇌하는 부분에서  아라스의 대선거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1789~1871>에 따르면 1820년대 프랑스의 참정권은 일년에 300프랑이상의 직접세를 납부하는 30세 이상의 남자에게 한정되어있었다. 전체 유권자 수는 10만명정도로  30세 이상 남자의 70분의 1, 국민전체의 280분의 1에 해당하는 극히 적은 수였는데 사회복지사업으로 쓴 돈만도 100만 프랑이 넘어가는 마들렌느 시장은 당연히 참정권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루이18세의 왕정기인 1820년대에 리슐리외 내각은  정권유지를 위해 선거법에 손을 대어서 기존의 비례대표 직접선거제를 없애고 소선거구 간접선거제를 도입하고 이중 투표제를 두었다. 이중투표제는 기존처럼 300프랑의 직접세를 내는 유권자가 뽑은 258명의 대의원이 있고 그 외에 1000프랑 이상의 직접세를 납부하는 부자들만이 따로 추가로 대의원을 뽑도록 하는 제도였다. 도 단위로 추가로 172명의 대의원을 뽑을 수 있는 부자는 1만 6천여명 정도. 세금을 더 내면 투표권을 하나 더 살 수 있는구조라서 뭐 이런 뭣같은 선거제가 다 있나 싶은데 궁금한 건 이거다. 마들렌느 시장은 이 1만 6천명의 부자 유권자중에 속했을까?

 팡틴 체포는 1823년 1월초의 일이다. 위고 선생님은 that same year라고 선거시기를 밝혔는데, 대의원 선거는 1821년에 있었다; 그런 관계로 그 선거가 그 선거인지 알 길은 없으나 마들렌느 시장이 돈 쓰는 단위를 보면 테나르디에에게도 선뜻 300프랑을 주고 포슐르방의 부서진 마차와 죽은 말을 사는 1000프랑을 내고 있으니 직접세 1000프랑이상 납부의 조건은 충족하고도 남을 것 같다. 막연하게 성공한 사업가 정도로만 생각했던 발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더구나 몽트레이유 쉬르 메르로 올때 가진 재산은 주교의 은그릇을 처분한 몇백프랑 수준이었는데 7년만에 프랑스의 1%안에 속하는 부를 가지게 되다니 주인공 보정을 생각하더라도 대단한 발장.

여기까지 이르고 나니 그럼 경감님은 선거권이 있었을까-가 안 궁금할 수가 없다. 1820년대 경찰월급이 얼마였는지 세금으로 얼마를 납부했는지는 프랑스쪽 자료를 뒤지지 않는 한은 알 길이 없으니 짐작이라도 해보자. 세금에 있어서 경감님 지갑이 티없이 맑고 투명한 유리지갑이었을거라는 건 확실한데 300프랑의 직접세를 내는 사람이 전체 남자의 1.4%남짓, 빈민에 해당되는 아래쪽에 인구가 대거 몰려있었을걸 감안해도 물려받은 재산 따위 없는 시골 경찰이 소득수준 1.4%에 들었을....까?

까마득하게 돈이 많은 시장님은 비교하기에는 너무 부자고, 팡틴 체포의 원인이 되는 바마타브와는 경감님의 증언을 토대로 하면 선거권을 가진 인간-300프랑 이상의 직접세를 납부하는-으로 4층짜리 석조건물의 소유자다. 경감님은 당연히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은 없었을거고, 온전히 월급으로 먹고 살아야하는데 당시 프랑스 물가가 상당히 미친 물가였다는 걸 감안하면 재테크에도 관심없었을 경감님이 재산 기준으로 300프랑 이상의 직접세를 냈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나 싶다. 거기다 대체로 경찰이라는 직업이 부르주아는 아니지만 부르주아의 이익을 수호해주는 아래 계급정도의 취급을 받아, 신사가 할 일은 아닌 일이라는 대우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소득수준 1.4%이상에 이를 만큼 월급을 빵빵하게 줬을 것 같지도 않다. 100년 뒤 런던의 촉망받는 경감인 찰스 파커씨의 경우를 봐도 귀족계급의 친구와 비교해보면 우울한 수입이었으니 잦은 소요와 혼란한 정국으로 TO는 확실하게 많았을 혁명기 프랑스 경찰이라고 월급이 많았을까.

아무튼 시민혁명이라고는 해도 프랑스혁명 초기 시민은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고 한다. 300프랑의 세금을 낼 수 있어서 선거권을 갖는 능동시민과 직접세를 내지 못해 선거권이 없는 수동시민. 소득과 상관없이 진정한 보통선거로 가는 건 1820년 기준으로 까마득한 미래인데 40세의 경감님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죄수와 집시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회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던 시절의 어린, 젊은 자베르는 선거권을 가질 희망은 경감님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전능하신 하느님이 오신다해도 전혀 없었을 거다. 당연히 사회를 움직일 한 표조차도 허락 못받은 소외받는 수동시민이었고 그렇게 본인이 강요받았던 부당한 출발을 생각하면서 바마타브와따위의 인성의 인간이 4층집을 소유하고 선거권이 있다는 이유로 훌륭한 사람 취급을 받는 사회에 대해서 고민을 해봤으면 좋았을텐데....고민하고 회의하면 그건 이미 자베르가 아니겠지ㅇ<-<

진짜 경감님은 그 시대를 살면서 공화파든 독립파든 자코뱅이든 아무튼 왕당파 아니고 보수 아닌 세력이 길에다 뿌린 팜플렛이라도 뭐 하나 주워서 읽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 평생 모니퇴르만 읽었나? 모니퇴르는 1819년에 창간했다는데 그 전에라도 뭐 읽은 거 없나? 책은 안 좋아해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일단 다 읽어봤다며 읽기만 하고 생각을 안 했나 어떻게 그렇게 세상에 관심이 없을 수가 있어ㅠㅠ 

 타고난 출신으로 놓고보면 -1820년대에는 적절하지 않은 개념이겠지만ㅋ - 샹퀼로트 오브 샹퀼로트인 경감님이 부르주아 왕당체제의 사회질서를 지키는데 온 인생을 다 바쳤다는 건 사실 좀 잔인하기도 하다. 물론 스스로는 부르주아 왕정이 아니라 법과 질서를 수호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사회가 그런 사회였고 마지막에는 단순한 형사담당이 아니라 공안까지 맡았던 거니까. 애초에 지스케는 반성해야한다. 이런 사람을 공안업무에 써먹다니 파리에 형사가 몇인데 보낼 사람을 보내야지 최소한의 적성도 고려를 안 한 인사배치로 결국 사람 하나 잡고...ㅠㅠ 거기다 본인은  왕당파...애초에 바리케이트에 가서 감시할 게 아니라 앙졸라스 옆에서 같이 총들고 싸웠어야하는 입장이었건만. 아무튼 본인은 본인의 일을 몹시 좋아했고 즐겼고 잘했으니 할 말 없고 내가 안타까워해봐야 의미 없는 게 결국 난 20세기 이후의 사회관과 정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19세기 초반 경감님과는 시각 자체가 다를 수 밖에 없겠지...그 길고 긴 혁명을 겪고서도 다수의 민중은 언제나 안정과 질서를 위해 투표했으니 경감님의 정치성향이 이해가 가면서도 슬프다. 00년 레미즈의 경감님 마지막 독백은 그나마 멋지게 각색해서 사법 정의와 휴머니즘에 대한 고민을 희미하게나마 비춰주지만 원작의 유언이나 다름없는 그 마지막 건의는...Aㅏ....... 

그러고보면 푀이가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운게 하루에 3프랑 받는 부채공장 노동자로 스스로 공부해서 글 깨우치고 팽창하는 강대국에 희생당하는 소국의 역사를 보고 화를 낼 줄 아는 역덕으로 성장하다니 과연 바리케이트에서 ABC들이 죽어가면서 그렇게 기다렸던 스스로 깨어나 일어날 민중의 상징이라고 할만하다. 앙졸라스의 그 길고긴 찬사가 괜히 나오는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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