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차고 고요했다. 막힌 호흡이 가져다주는 먹먹함과 얼굴에 닿는 서늘함이 일체의 어지러운 감정과 생각에서 그를 갈라놓았다. 무심하고 치명적인 차단이 주는 침묵에서 자베르는 얼굴을 들었다. 흐르는 물기를 닦아내던 그는 창밖에서 들린 요란스러운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 목공소에서 주인이 고집 센 늙은 말을 다그치는 평범한 소란이었다. 보이는 것은 여느 때와 같이 활기차고 소란스러운 몽트뢰유쉬르메르의 새벽이었다.
1월의 추위가 창문에 성에로 반짝이는 그림을 그려놓은 날씨에 바깥 공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찬물로 얼굴을 씻은 자베르가 숨을 내쉬자 서늘한 방안에 하얀 입김이 보였다. 문지기와 청소부를 겸하고 있는 문간방의 노파가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숄을 다시 두르고 목덜미를 여미는 것은 단지 이 방의 주인이 무섭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혼자 사는 남자라면 흔하게 가지고 있을 술병 하나, 카드 한 벌도 없는 삭막한 방은 감정적인 열기만큼이나 물리적인 온기도 결핍되어 있었다. 추위를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몽트뢰유쉬르메르는 남프랑스의 기후에 익숙한 그에게는 추운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가장 추운 계절에 새벽까지 훈훈한 열기를 유지해 두지 않은 것은 따뜻함이 가져다주는 이완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거리로 나선 자베르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방은 노동자들의 구역에 있었으므로 새벽 일찍 공방의 문을 여는 주인들과 찬바람에 상기된 얼굴로 일터에 나오는 젊은 직공들과 어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졸음이 덜 떨어진 눈을 비비거나 저희들끼리 장난을 치는 심부름꾼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이웃이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이 자베르를 보고 소리를 낮추고 아이들은 어른들 뒤로 숨었다. 샛길에서 빠져나오던 품행 나쁜 직공 두엇이 자신을 눈치 채고 슬쩍 피하는 것을 보며 자베르는 청년들의 이름을 새겨두었다. 골목 사이로 들어서는 그의 등 뒤에서 안도와 비슷한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 중 누구도 친근하게 마을의 경감을 불러 세우며 아침 인사를 건네거나 담배를 권하는 사람은 없었다.
골목길은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고 골목을 이루는 담은 번듯한 벽에서 썩어가는 판자로 바뀌어갔다. 악취가 무겁게 가라앉은 뒷골목을 돌아보는 자베르를 보고 피하는 사람은 걷지 못하는 늙은 거지뿐이었다. 이미 깨어있고 움직일 수 있는 치들은 자베르의 모습이 골목 입구에 나타났을 때 재빠르게 시야 밖으로 몸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밤사이 골목을 오갔던 악덕들, 술과 매춘과 도박과 싸움의 흔적이 어지럽게 버려진 빈민가, 무기력과 나태로 찌든 이 구역이 건실한 노동자들의 구역과는 달리 아침이 오려면 멀었다는 것은 자베르가 일했던 다른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보기 힘든 것이 있었다. 몽트뢰유쉬르메르의 빈민가에 부족한 것은 얼어 죽은 시체였다.
한 겨울 새벽이면 동사자가 나오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상이고 그 시체를 수습하는 것이 보통 일과의 시작이었지만 몽트뢰유쉬르메르에서는 그 빈도가 현저하게 낮았다. 기후 덕분은 아니었다. 지금의 시장이 자리에 오르기 전, 사업으로 성공하면서부터였다. 정직한 노동으로 돈을 벌 의욕 따위는 없는 쓰레기들조차도 얼어 죽지 않도록 직접 살피는 것을 의무로 아는 마들렌 덕분에 이 도시는 겨울에도 빈민들의 사망률이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 마들렌의 적선을 노려 일부러 아이들까지 거리로 내몰아 돈을 뜯어내는 쓰레기들도 있었지만 마들렌은 오히려 그들에게 집을 구해주고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으로 악의를 갚아주었다. 낮에도 경찰들도 혼자 오기를 꺼려하는 험한 구역에서 위험을 마다않고 돈을 나눠주고 다니는 시장의 모습을 떠올리는 자베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베르가 마들렌을, 그의 상관을 생각할 때면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감정들은…간단하게 말하면 불편했다. 의심과 불신과 경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는 존경과 복종. 악취 나는 뒷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밝은 거리를 지나 경찰서에 도착해서도 자베르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당직 경관들의 보고를 받고 밤사이 도착한 공문을 확인하고 평소와 같은 순찰과 신고접수와 현장방문으로 이어지는 평범한 하루를 겉보기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내는 그의 평정은 점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이웃 간의 소소한 불만이 있었고 취객들의 소란이 있었고 그리고, 창녀가 번듯한 시민에게 덤빈 소동이 있었을 뿐.
“당신이 말한 사실은 시 경찰에 관한 사항이오. 형사소송법 제9조, 제11조, 제15조 및 제 66조에 의하여 내가 이 사건의 판사요. 나는 이 여자를 석방하도록 명하오.”
감히 이의도 반론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하게 말하는 시장을 자베르는 혼란에 빠진 채로 보았다. 온정이 권위를 누르고 친절이 정의를 흔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한 가운데에서 그는 그동안 간신히 유지해 온 위태한 균형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겉으로는 시장과 경감의 상하관계였지만 그 아래는 표적과 추적자의 역전된 관계. 기회를 노리던 자와 기회를 피하던 자의 평온이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자베르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시장님…….”
시장은 이 여자를 구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베르는 상황을 바꾸려했다.
“불법 감금에 관한 1799년 12월 13일 자의 법률 제 81조를 상기하기를 바라오.”
마들렌은 바뀌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말하는 시장을 자베르는 절망적인 눈으로 보았다. 시장이 바뀌지 않는다. 이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변해야 할 것은 자베르 자신이었다. 자비 앞에 굽혀야 하나. 친절을 위해 휘어야 하나.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옳은가.
“시장님, 부디…….”
“더 이상 아무 말 마시오.”
마들렌은 본래부터 그렇게 새겨놓은 석상처럼 변하지 않을 확고함으로 자베르의 말을 막았다.
“그렇지만…….”
마땅히 복종하고 순명해야할 시장에게서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였다. 죄수. 그동안 확신 없이 더듬어왔던 의심의 정체를 자베르는 그 순간 간파했다. 갑자기 시력을 되찾은 사람처럼 또렷하게 떠오른 시장의 본모습을 알아본 자베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마음을 정했다. 마들렌을 고발하고 그 정체를 폭로하고 마땅히 받아야할 벌을 받도록 하고 이 모든 것을 되돌려야했다. 마들렌이 손을 들어올렸다.
“나가시오.”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시장이 입 밖으로 낸 명령에 자베르는 반듯한 자세를 한 번 더 가다듬었다. 이대로 나가 이 자의 기만을 고발해야 한다. 그것이 옳다. 걸음을 옮기려던 자베르가 돌연 멈춰 섰다.
총성.
허공에 울리는.
어둠.
눈 아래 가득한.
자베르는 자신을 보는 마들렌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폐로 아프게 밀려들던 강물은 지금 이곳에는 없었으나 바로 서 있기 힘들 정도의 통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숨을 내쉬고 난 그는 시장에게 답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사임하겠습니다, 시장님.”
시장은, 마들렌은, 발장은 자베르를 보았다.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팔고 자신마저 팔게 된 어머니를 동정하던 그 눈 그대로였다.
“당신은 이번에도 잘못된 선택을 했어요, 자베르.”
자베르는 가석방 위반범의, 한때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죄수의 슬픈 눈을 마주보았다. 울며 자비를 구걸하던 여자도, 어쩔 줄 몰라 하던 경찰들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었다. 벽도 바닥도 천장도 없는 순백의 공간 안에는 발장과 자베르, 두 사람만이 있을 뿐.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연민과 안타까움이 습윤하게 스민 발장의 시선을 자베르는 괴로운 얼굴로 고스란히 받아냈다.
“난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당신을 고발할 수는 없었습니다. 법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할 수 없으니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데 내가 달리 어떤 선택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신과 함께 그 여자를 병원으로 데려 간 다음 당신의 편지를 들고 그 여자의 딸을 찾아 몽페르메유의 여관으로 가야했습니까? 당신과 그 여자의 잘못을 모두 덮어두고서?”
“그렇게 해줄 생각은 있었나요, 자베르?”
“명령이라면 따랐을 겁니다. 그리고 사임했겠지요.”
“당신의 한결같음에는 할 말이 없군요.”
“그러니 포기하십시오.”
자베르는 ‘제발’이라는 말을 삼켰지만 그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있는 발장에게는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했다. 발장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나타난 낡은 의자에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이 날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내가 갈 곳은 지옥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받고 내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게 여기서 내보내주십시오.”
“당신이 강에 뛰어들기를 반복한 게 몇 번인지 기억이나 하나요? 옴므 아르메 거리에서 노트르담 다리까지의 그 ‘산책’을 몇 번이나 거듭했는지 셀 수는 있나요? 여기서 당신이 겪은 괴로움을 생각하면 정말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고 확신하지는 못 할 텐데요, 자베르.”
발장은 고개를 흔들며 쓰게나마 웃음을 섞어 말하다가 자베르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거뒀다. 표정을 숨길 줄 모르는 경찰의 얼굴에는 경악과 공포가 선명했다.
“…당신은 지옥에 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옳지 않아요.”
“난 죽으면서 병자성사를 받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지옥에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래서 하필 당신과 이런 곳에 갇혀서 당신이 변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이런 끝없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당신은 이미 충분히 괴로워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는-”
오래전 시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베르는 신에게도 항변할 기세로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끈기 있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발장 앞에서 자베르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죽고 난 그 순간부터 당신의 임종까지.”
수천 수만 번의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사실에 발장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한참 후였다.
“대체 왜 그걸 말하지 않은 거요?”
묻는 이의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듣는 쪽의 반응은 편안하지 못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사를 초월한 의무감에 놀라야하나? 죽었어도 포기하지 않는 추적자를 다시 두려워해야 하나? 하지만 자베르는 이미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던가. 더 부연설명을 하지 않는 답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발장은 자베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당신에 관한 기사를 읽고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한 것은 사과해야겠군요.”
머릿속에 맴도는 하고많은 말 가운데 툭 튀어나온 발장의 말에 자베르는 더 괴로운 얼굴로 대꾸했다.
“당신이 오리온 호에서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 나는 잘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알 기회가 별로 없었지요.”
실은 죽고 난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발장은 씁쓸하게나마 웃었지만 자베르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발장이 이전에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시장에게 파면을 구하며 악수를 할 자격이 없다고 할 때에.
“하지만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자베르. 왜 그렇게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겁니까? 내가 당신을 풀어주던 순간 나는 당신에 대한 증오를 접었고 그걸 느낀 당신은 날 놓아준 순간 변했어요. 아니라고는 하지 말아요. 이미 다 보았으니까.”
다른 선택을 바라면서 거듭 시간을 되돌려 자베르가 걸었던 마지막 길을 수없이 함께 걸었던 발장이 완고한 경찰의 항변을 미리 막았다.
“자살이 문제인가요? 대죄가 맞지만 신은 그렇게 가혹한 분이 아니에요. 어째서 용서를 거부하고 은총을 마다하는 건가요? 당신은 자신의 죄를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말씀드렸듯이 나는 당신을 지켜보았습니다.”
거짓을 모르는 죄인의 눈으로 자베르가 무겁게 다시 고백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발장을 고통스럽게 보던 그는 포기한 듯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의 고백을 보고 들었고 당신이 그 대가로 무엇을 희생했는지를 압니다. 당신이 딸의 옷을 끌어안고 우는 것을 보았고, 스스로 당신의 아이들에게서 멀어지기로 한 것을 보았고, 사라진 의자와 불 꺼진 벽난로를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보았고 그래서 결국 그것을 견디지 못한 것을 모두 보았으니까요.”
“…그것은 내 일이지 당신과는 관계가 없어요.”
생전에 관찰이 습관이었던 경찰의 답을 들으며 발장은 무릎에 얹어 놓았던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제는 괜찮은 줄 알았던 상실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아이들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그저 행복하기를 평안하기만을 바랐을 뿐. 하지만…. 발갛게 언 손에 인형을 안고 올려다보던 아이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검은 옷의 촉감과 향기가 되살아났다. 이제는 더 이상 그의 딸에게 맞지 않을 그 옷을 품에 안고 울었던 그날 밤부터 몇 번이고 그 아이를 보러가려다가 발길을 돌렸던 그 골목에 깔린 돌의 갈라진 모양까지 모두. 발장의 침묵에 자베르가 다물었던 입을 다시 열었다.
“당신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정직했고 그 정직이 당신을 죽였지요. 당신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나는 당신의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렇게 쫓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런 위기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당신이 아이들을 떠날 일도 없었을 겁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자베르의 물음에 발장이 고개를 들었다. 파면을 요구하던 때 자베르는 자신이 밀정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지금 자베르의 표정은 스스로가 밀정보다 훨씬 큰 벌을 받고 경멸받아 마땅한 죄인, 지옥불에 영원토록 불타는 것 이외의 다른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될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날 살렸지만 난 당신을 죽였습니다.”
자베르의 자기 고발로 발장은 셀 수 없이 함께 되풀이 했던 실패의 원인을 찾아냈다. 자베르가 스스로에게 기한 없는 감금형을 선고한 죄목은 결국 그것이었다. 생전의 모든 고통과 시련의 흔적은 남았음에도 원망도 증오도 없는 얼굴로 발장이 부드럽게 죄인에게 말했다.
“난 당신을 살린 줄 알았지만 결국 당신을 죽였으니 우리는 같은 죄를 지었군요.”
“그것과는 다릅니다! 내 선택은 당신의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당신은 여기에서 나가야해요. 적어도 좀 더 나은 곳에서….”
자베르의 항의는 팔을 잡은 발장의 손에 가로막혔다. 따뜻해지지도 차가워지지도 않던 심장을 지니고 있던 자베르의 눈에는 발장과는 달리 물기는 없었다. 후회와 혼란과 자책만이 가득차고 넘칠 뿐. 그러나 발장의 손에 잡힌 검은 옷자락에서는 방금 전까지는 없던 물기가 배어나고 있었다. 6월 밤의 강물이 자베르의 옷소매를 흠뻑 적시고 발장의 손으로 흘러 떨어졌다.
“내 말 잘 들어요, 자베르. 그것은 내 시험이었어요. 내 몫의 잔이었으니 당신에게 죄를 물어야 할 일이 아니에요. 자베르? 듣고 있어요? 제발 다시 생각해요. 나는 당신을….”
소용돌이치는 물소리, 수면에 닿을 때 몸을 때리는 아픔, 먹먹한 수압이 발장의 부드럽지만 확고한 음성이 자베르의 귀에 닿는 것을 가로막았다. 밤은 깊고 물도 깊어 더 이상 자베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 안으로 밀려들어온 물이 숨을 멎게 하자 강바닥의 진창이 제 손으로 집행을 마친 사형수의 시신을 받아주었다. 자베르는 자신의 죄에 다시 가라앉았다.
“…증오하지 않아요. 당신이 날 놓아주었기 때문에 난 마지막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겁니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발장이 힘없이 말끝을 떨어뜨렸다. 더 이상 발장과 자베르가 있는 공간은 백색의 무로 가로막혀 있지 않았다. 보는 이에 따라 묘사할 말은 각기 다르겠지만 결론은 한 가지로 같을 수밖에 없는 곳.
“아직도 진전이 없네요.”
지난 슬픔의 흔적은 조금도 없이 천국의 햇살을 듬뿍 받고 선 팡틴이 말했다. 마찬가지로 맑은 빛 속에서 발장이 낡은 의자에 앉아 자베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끈질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래서는 어렵지 않겠어요?”
외출이라도 할 것처럼 모자와 장갑을 챙겨든 팡틴이 발장 곁으로 다가와 그의 근심거리를 함께 보았다.
“다 사랑을 못 받고 커서 그런 거예요. 아예 더 멀리 돌아가서 아빠라도 되어주지 그래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발장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런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올 때까지 본인이 애써온 모두를 부정하는 것은 그의 일생에 대한 모욕 같아서 그럴 수 없었어요. 그래서는 자베르가 자베르일 수 없으니까. 나는 그를 부정하지 않고서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그가 그인 이상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걸요.”
가망 없어 보이는 꿈을 말하는 발장에게 팡틴이 연민과 응원이 섞인 시선을 보내며 모자를 썼다.
“일단은 두고 일어나셔야 할 거에요. 안 그러면-”
“뭐하세요? 어서 오세요! 두 분 다 이러다 늦겠어요!”
완벽하게 차려입은 쿠르페락이 바쁘게 달려와 발장에게 모자를 건넸다.
“다들 벌써 가 있는데 제일 중요한 가족들이 빠지면 안 되잖아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살아있는 사람들한테 안 보인다니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요.”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붙임성 좋은 쿠르페락이 웃으면서 팡틴을 신사다움의 교본 같은 태도로 에스코트했다.
“어서요!”
여전히 움직임이 없는 자베르를 내려다보던 발장이 결국 일어선 것은 쿠르페락의 재촉을 한 번 더 받은 다음이었다.
교회 안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 모여 있었다. 마리우스와 코제트를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는 질노르망 노인 옆에 앉은 레글르가 열심히 말을 건네는 것을 졸리와 푀이가 한쪽은 웃으면서 한쪽은 한심해하면서 지켜보고 앙졸라스와 콩브페르의 뒤에 앉아 가능한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랑테르 옆에서 프루베르에게 손에 들고 온 들꽃다발을 보여주던 가브로쉬가 늦게 도착한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쿠르페락이 팡틴과 발장을 맨 앞줄 가족석으로 안내하고는 바오렐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앉았다. 역시 먼저 와있었던 퐁메르시 부부와 눈인사를 나누는데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일어나 제대 앞으로 나왔다.
“눈이 꼭 제 엄마를 닮았어요, 그렇죠?”
그 자신도 아직 소녀로만 보이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사내아이를 보며 팡틴이 속삭였다. 어머니와 딸과 그 아들의 서로 닮은 눈을 보며 발장은 미소 지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 어린이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실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이 예식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이 어린이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으셨습니까?”
사제의 물음에 어린 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장 조르주입니다.”
아버지의 답에 팡틴이 발장의 손등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발장이 조르주 퐁메르시에게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자신의 이름을 딴 갓난아기를 새삼 보았다. 엄마를 닮은 푸른 눈이 발장을 향하더니 눈을 맞춘 아이는 소리 내어 까르르 웃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죽은 이의 미소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뻗는 작고 포동한 손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려다가 발장이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쥐었다.
어쩌면 저 아이를 품에 안아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만져보고 아직 솜 털 같은 머리칼에 코를 묻고 아이 냄새를 느끼고 아이의 첫 걸음마를 지켜보고 아이와 산책을 나갈 수 있었을지도. 그렇게 행복한 부부와 사랑받는 아이의 가족이 되었을지도. 지금의 벅찬 행복만큼이나 무거운 절망이 되살아나 묵지근하게 명치를 짓눌렀다.
철저하게 혼자라고 생각했다. 그때만큼은 신마저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저 하루 빨리 그 고통을 끝내주기만을 기도했을 뿐. 그런데 그가 있었다. 그 외롭고 비참한 길을 서성이는 내내, 하루하루 사그라지는 자신을 보며 괴로워하던 영혼이.
미련한 사람.
“주님 성자를 통하여 이 물에 성령의 힘을 충만히 부어 주시어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묻힌 모든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제의 손이 세례에 쓰일 물에 닿아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대리석 수반에 담긴 물 바닥에 햇살이 어른거렸다. 구원과 속죄의 물은 별빛마저도 없이 캄캄하던 밤의 강물과는 달리 맑게 반짝였다. 다리 위를 걷던 흔들림 없는 걸음. 거친 펜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가던 마지막 메모. 강둑 위에 놓이던 모자.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물 아래 삼켜지던 사람. 수 없이 자신을 거듭 죽이는 사람을 지켜봐야만 했던 무력한 아픔이 자신만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도 죽어가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가장 외로운 시간에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자베르를 놓아주었던 것은 순전히 의무감이었다. 그를 죽여 자신이 평안해지는 것은 신 앞에 떳떳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살려주었다, 그를 증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래야만 신 앞에 떳떳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될지, 그 구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거지에게 금화를 건네듯 그에게 자유를 적선했을 뿐.
발장이 새삼 괴로움에 차 올라오는 신음을 삼키며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무서우신 분. 그 지난한 구원의 시도는 결국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군요.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장 조르주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안배하셨으니 이제는 그만 그를 구해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의 원죄를 사하고 아이의 영혼에 구원의 징표를 입히는 몇 방울의 물을 보며 발장은 물 아래 가라앉아있을 추격자를 위해 자신을 구원한 존재에게 기도했다. 그의 새로운 세례를 위해, 죄 사함과 구원의 증표로 필요한 물은 그를 삼킨 세느강의 물로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물은 차고 고요했다. 막힌 호흡이 가져다주는 먹먹함과 얼굴에 닿는 서늘함으로 일체의 어지러운 감정과 생각을 씻어내려는 의도는 물에 어른거리는 반짝임에 방해를 받았다. 자베르는 물기가 흐르는 얼굴을 들었다. 1월의 이른 새벽치고는 유달리 햇살이 환한 창 쪽으로 다가간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새벽 일찍 길을 나선 사람들을 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서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상관, 몽트뢰유쉬르메르의 시장. 이렇게 이른 시간에 시장이 이런 곳에 무슨 일인가 생각하던 그는 시장의 얼굴이 기억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베르는 이제 시장의 본 모습과 진짜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죄수, 그의 사냥감, 그의 구원자.
어느새 체포해야 마땅할 상대와 마주선 자베르는 죄수의 수감번호를 외치며 수갑을 내밀지 못했다. 자신이 죽인 사람. 자신이 잡고 있는 사람. 어깨를 짓누르는 죄의식을 더는 버텨내지 못하고 자베르는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이제 그만 당신을 용서해요.”
거칠고 커다란 손이 정수리에 닿았다. 영혼도 무게가 있을까. 더 이상의 반박과 저항을 모두 무력하게 만드는 그 손길 아래에서 자베르는 생각했다. 머리 위에 닿은 손이 묵직하고 따스한 것을 보면 영혼은 무게뿐만이 아니라 체온까지도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옳지 않았다. 이러한 안온함을 느낄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자신의 몫으로 합당한 것은 작열하는 불꽃과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이지 이렇게 따뜻한 손길이 아니었다. 발장은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옥이 이렇게 위로를 받는 곳일 수는 없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는데,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데 어째서 이렇게. 증오는 차라리 쉽고 편안했다. 그러나 용서는 이렇게도 무서웠다.
“같이 갑시다. 해야 할 말이 아주 많아요.”
자베르는 더는 거역하지 못하고 발장이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미 지나온 지 오래인 천국의 문이 등 뒤에서 희고 아름답게 빛났지만 그는 굳이 뒤돌아 그 문에 새겨진 말을 읽지 않았다. 이제는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므로.
-뱀발
“증손자 이름에 영감님 이름은 안 들어가서 서운하지는 않으세요?”
레글르가 옆에 앉은 노인에게 물었지만 노인은 흐뭇한 눈물이 촉촉해진 눈으로 아기를 보느라 답이 없었다.
“이름 때문에! 서운! 하지는! 않으시냐고요!”
레글르가 노인의 귓가에 소리를 높여 천천히 한 글자씩 말하는데 옆에 앉은 푀이가 레글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보쉬에, 그 분은 아직 살아계셔.”
“뭐?! 난 당연히 영혼일 줄 알고….”
“노인들 특유의 퇴행성 질환은 보이지만 건강하시네.”
레글르가 놀란 눈으로 질노르망 노인을 보고 졸리가 나직나직 노인의 건강상태를 점검하는 말에 푀이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야, 그렇지 않은가, 바스크? 아아, 내가 백서른 살까지는 살아야 저 귀여운 아이가 자라는 걸 제대로 볼 수 있을 텐데.”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셋의 나이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오래 살아남아있는 노인의 바람에 누구도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한 청년들이 입을 모아 소리 없이 덧붙였다.
- 별관에 자꾸 스팸이 붙어서 조만간 합칠까 생각 중이라 일단 여기에
아니 도대체 광고효과를 노린건데 어떻게 그렇게 사람 안 오는 곳에 스팸봇이 붙을 수 있는 건지 신기ㅋ
- 사실 이건 부활절 특집이었는데...뭐 그래도 크리스마스 전에 올릴 수 있었으니 그게 어딘가...;
- Q> 자베르 공략중인데 엔딩이 한 가지 밖에 안 나와요.
자베르 엔딩 세느강 투신 한가지뿐인가요? 다른 사망캐는 다 천국엔딩 있는데 자베르는 아무리 사랑과 자비와 용서 스펠 걸어도 세느강 엔딩 밖에 안 나와요. 엔딩롤에 다들 두유히얼더피플씽 부를때도 안 나오던데 이거 버그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