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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트로바토레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굴까 본문

Don Carlo/TH

일 트로바토레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굴까

neige 2016. 4. 26. 02:03








저번에 브링힘홈도 그렇고 바리톤 버전 베르테르도 그렇고 신기한거 찾아서 하실 때 종종 있는데 이것도 그 중에 하나. 

프랑스어판 일 트로바토레 일 발렌...프랑스어니까 르 투르바...아무튼 프랑스어.  


익히 아는 이탈리어판 일 트로바토레의 성공 후에 프랑스에서 그거 프랑스어로도 만들어주심 안 될까요? 물론 발레는 꼭 넣어주시고요! 의뢰를 하자 베르디가 거기 응해서 작업을 한 것, 이탈리어판과 비교해서 아주체나의 음악 쪽에 약간씩 수정이 들어갔는데 이런 변경사항이 다시 요즘 공연되는 이탈리어판에도 영향을 주긴했지만 프랑스어판은 그때 이후로는 거의 공연되지 않는다. 


햄슨이 '무거운' 베르디 롤을 시작하던 무렵에 나온 녹음인데 왜 굳이 프랑스어로 하셨을까 궁금한데 답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이것만 딱 하나 있는 건 아니고 이탈리아판 일 트로바토레 레코딩도 있음. 

기념음반에서 몇몇부분만 듣고 너무 재미있어서 구하려다가 절판된 상태고 알라냐와 게오르규의 계약이 얽혀있으니 아마도 재판될 일도 없을 것 같아서 중고 CD를 사려다 실패하고 약간의 도움을 받아서 아마존 음원을 샀음.









마클에서 학생들한테, 오디션볼때는 꼭 작품 전체를 다 부를 수 있는 걸 하세요, 일 발렌 하나 부를 수 있다고 해서 와 젊은 베르디 바리톤! 해서 무대에 서면...특히 루나는... (웃음과 한숨) 그랬던거 보면 고생했던거 같은데 너무나 유리랑 실크로 만든 루나다ㅋㅋ 레오노라-만리코 커플이나 아주체나가 손가락질만해도 금가고 살짝 밀기만해도 파스스 깨질듯ㅋㅋㅋ 위에 있는 프랑스어버전보다는 좀더 강렬한데 그래도 여전히 깨질것 같은 루나임ㅋ


이 루나는 밤에 몰래 레오노라 창문 밑에 가서 스토킹할때부터 이미 너무 애틋한 사랑을 하고 있다.

 

레오노라랑 결혼하면 아들 둘 낳아서 큰애는 아버지 이름 붙이고 작은애는 잃어버린 동생 이름붙이고 사이좋게 키워야지 우리 둘째는 절대 수도원같은데 안 보내도 되도록 미리미리 열심히 싸워서 물려줄 영지도 늘려놓고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게하고 그래도 레오노라 닮은 딸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상상 아닌 계획 다 세워놓았을 것 같음.


실황이 아닌 스튜디오녹음이지만 햄슨특유의 그 눈웃음 지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보는 표정으로 어둠 속에서 여자방 창문 보고 있는거 상상하면 소름끼치지만 절절함. 그런 행복한 미래를 와장창 깨뜨리면서 끼어든 만리코가 나쁜놈이고, 어둠이라 루나를 만리코로 착각하고 매달리면서 사랑의 말을 쏟아내는 레오노라가 너무 잔인하다ㅋ 분노로 불탄다고 어금니 무는 햄슨루나 목소리 진짜 떠는 거 같아서 좋음. 잔인한 커플들ㅋㅋㅋ


"어리석은 사람 당신이 감히 저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거요? 나는 반드시 그를 죽여야겠소 당신이 내뱉은 그말이 바로 그의 사형선고요!" 여기서 분노하는 건 다들 마찬가진데 이 루나는 분노 이전에 상처받은 게 너무 잘 들려서 이쪽이 이물질에 스토커인데도 동정이 가고, 칼 들고 덤비기 전에 주먹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루나라서 좋아서 굴렀다..


이 앨범의 햄슨루나에 대해 호의적인 평 중에 비록 위대한 바리톤들이 가지고 있는 따스함과 풍부한 울림은 결여되어있고 다소 건조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지만, 지적인 면모와 편집증적인 분노가 백작을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루나 불우한 어린시절에도 불구하고 영지관리 합리적으로 잘 하고 군주를 돕는 유능한 군인이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저주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멀쩡할 것 같은 부분들이 있다. 나중에 루나가 아주체나랑 만리코 잡고 나서 처형하기 전에 내가 왕자께 위임받은 권한을 이렇게 남용해도 되는걸까-상식인다운 고민을 하는데 딱 그게 평소의 루나일것 같음. 그러고나서 바로 이게 다 레오노라가 잔인해서 그래 남탓하는데서 이미 구원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게 안 보이게 곱게깊게 미쳐있던 게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일 발렌부터 터져나오는 거.


소년의 어머니는 아마도 동생을 낳고 세상을 떠났겠지.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을텐데 어린 동생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치유를 장담 못하고 원인도 알 수 없이 모두가 애를 태우고 아버지의 초조함과 비탄은 말할 수 없는 가운데 백방으로 아이를 낫게 할 방법을 찾았을텐데, 아버지의 귀에 누군가가가 아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집시의 저주때문이라는 말을 흘리고 마는 것. 아버지 백작은 격분해서 집시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고 그 모든 과정, 끌려온 집시노파의 알 수 없는 말, 어린 도련님의 운명이 너무도 기이해서 보았을 뿐입니다, 납득할 수 없는 항변과 원하는 답을 끌어낼 때까지 끝나지 않는 잔인한 심문과 최후의 자비마저도 내주지 않은 불합리한 심판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는 소년을 생각해보자. 억울한 어머니를 놓아달라는 미친듯한 집시여자의 외침도 성 밖에서부터 들렸을 그 밤,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복수의 밤은 산채로 타죽는 집시의 비명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어린 동생이 사라져버렸다. 모두가 넋이 나가 아이를 찾는데 날이 밝아올 무렵 차마 말하기 힘든 소식이라며 달려온 사람이 겨우 입을 떼는 것. 타죽은 집시노파의 발밑에서 어린아이의 불탄 뼈가 나왔다고. 아버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비탄을 버틸 힘도 남지 않았으니 오래지 않아 끝내 세상을 떠나고 남은 건 이제 소년 하나.


그 모든 상실을 겪고 백작이 된 이 불행한 사람이 집시라면 눈에 띄는 족족 무조건 태워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견하지 않음?


햄슨루나는 일 발렌에서 그런 애잔한 개인사가 저절로 떠오를만큼 천하제일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이라 당장 데려다 안아주고 얼마나 힘들었니 토닥토닥해주고 호호 불어주고 마음 다친거 아플까봐 조심조심 어루만져주고 내가 그 상처 극복시켜주고 싶은데 정신차려보면 아 잠깐 히이익 이거 미친 스토커였지 속았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스터클라스에서 작품 전체를 통틀어 이 순간이 루나의 가장 밝은 순간이고 가장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고 하더니 과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미친 소리를 다 듣고 납치에 가담해야하는 부하가 이래도 되냐고 하는 것도 평소에 멀쩡하던 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셨나-일것 같음. 부하야 경악을 하거나 말거나 루나가 신마저도 내게서 그녀를 빼앗아 갈 수 없다고 할 때 처음엔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스스로를 격려하는 것처럼 씩씩하다가 마지막에 너무 희열에 차있어서 미쳤구나 드디어 이 시점에서 이성을 놓았구나 이젠 못 돌아가ㅋㅋㅋㅋㅋㅋ


정작 레오노라가 수녀들과 있는 거 보고는 안돼 안돼 신이라도 내게서 널 앗아갈 순 없어 하는데 이게 원래가 소곤소곤대는 느낌+햄슨 목소리=필사적인 기도라 레오노라도 신도 운명도 베르디도 아무래도 다 루나한테 너무한 거ㅋㅋㅋ 


아주체나를 미끼로 만리코를 잡아들이고 레오노라의 행방을 몰라 애태우는 루나 앞에 스스로 나타난 레오노라가 딜을 걸 때도 바로 앞에서 사랑의 장밋빛 날개를 타고-부르면서 가련한 장미가 아니라 우아하지만 아주체나만큼이나 강렬한 불꽃이 된 레오노라를 이미 들었기때문에 루나의 앞날이 걱정될 수 밖에 없다ㅋ


여기 레오노라가 만리코 살려주고 날 죽여서 차라리 내 피를 마시라고 할 때 당신이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잔인하게 그를 죽이고 싶어진다는 루나는 이미 심장에서 피흘리고 있음ㅋㅋ 대사를 보면 여기서 잔인하고 자비없는 건 루나인데 소리로 들으면 핍박당하는 쪽이 루나임ㅋㅋ 잔인한 레오노라ㅋㅋㅋ


레오노라가 협박하다가애원하다가 그럼 날 주겠다고 만리코를 살려달라고 하니까 루나 너무 진심으로 감격하고 좋아해서 당장 무릎 꿇고 옷자락에 입맞추고 글썽글썽한 눈으로 올려다 볼 것 같아서 넌 내 시체나 갖게 되겠지하고 왈칵 독 마시는 레오노라 너무하고요....  여기서 루나는 마침내 폭력으로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된 스토커인데 햄슨루나가 이건 꿈이 아니겠지요 당신이 내 사람이라니 맹세해줘요 두번 맹세해줘요 매달리는데 1막에서 만리코랑 레오노라가 무참하게 짓밟았던 소중한 미래, 그거 주워담아서 부서진 수수깡집에 떨리는 손으로 풀칠해도 될까 희망을 찾는 가련함이 너무ㅋㅋㅋㅋㅋㅋㅋ좋음ㅋ  


게오르규레오노라 귀족 그 자체인데 사랑은 장밋빛 거기서 아주체나 못지않게 풀파워업하는 게 너무 좋았는데 결국 루나 등 돌린 사이에 독 마실 때 너무 무섭고 단호하고 뒤통수에 바로 총쏘는 것 같아서 둘의 케미가 너무 좋다ㅋㅋㅋㅋ 시몬 보카네그라에서 아버지랑 딸로 나왔던것도 좋았는데 이런 레오노라 루나 케미라니ㅋ 기념 음반에 일 발렌 말고도 레오노라와의 이 듀엣도 들어가 있는데 그게 너무 좋아서 구하려고 더 애썼는데 보람이 있음,    


아 물론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그렇다고 루나의 불행한 과거가 스토킹과 폭력적인 사랑에 면죄부가 되어주지는 못함 (정색


애초에 이 모든 비극, 아버지가 시작한 복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사람도 루나였고, 레오노라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과 집착으로 인한 증오 대신 관용을 베풀어야할 사람도 루나였음. 모두가 행복하게 끝날 수도 있는 이야기에서 스스로와 모두를 파멸로 끌고가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모두 루나 본인이기때문에 아무리 애틋하든 불쌍하든ㅋ   


햄슨은 일단 사랑하면 그게 옳은 사랑이든 아니든 너무나 진심이고 절대적이라 듣는 사람의 연민을 끌어내는데 이게 선역이면 괜찮은데 루나나 스카르피아나 이런 미친역이면 내 연민에 내가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 배덕감이 너무 재미있다. 


거기다 여기 아주체나가 워낙 짱짱쎈 아주체나라서 원작 버프+해석 버프로 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시피 한데, 루나가 주연 넷 중에 지위가 제일 높고 권력도 가장 강한데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먹이사슬 맨 밑바닥에 있다. 덕분에 마지막에 아주체나가 그는 네 동생이었다-터뜨릴 때 발밑에 깔아버리는 느낌이 너무 좋다. 잔인한 아주체나...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도는데도 믿지않고 혹시...혹시...하면서 동생 찾는 루나보고도 불쌍한 마음이 안 들다니ㅋ 


아주체나나 만리코나 레오노라는 좋았지만 차마 루나가 좋다고 남한테 권해주기는 힘든데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음.


원래의 루나, 그리고 일 발렌은 이런 느낌이다.



 


베르디 의도가 제대로 보이는데, 일 트로바토레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당연히 아주체나 아들이랑 어머니지. 루나 그 스토커?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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