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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서늘하니 이런 것도 본문

Don Carlo/TH

바람이 서늘하니 이런 것도

neige 2015. 8. 30. 20:53





예브게니 오네긴.

아직 한 계절은 더 이른 감이 있지만.


나는 텍스트 제일주의자라서 소설이든 시든 희곡이든 원작이 있을 때는 아무리 음악이 좋아도 원작이 최고시다 원작을 읽자-고 생각하지만 오네긴은 아직도 원작을 안 읽었다. 한 번쯤 읽긴 읽어야지 언제까지 러시아 문학한테 도망만 칠 건가 싶긴 싶은데 아직은... 좀 나중에.


발레로도 유명하지만, 바리톤이 주인공인 오페라로 바리톤 덕질을 하려면 피해갈 수 없는 작품인데, 당연하지만 햄슨도 오네긴 했다. 그것도 여러 번. 그런데 여태껏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던 건 원작이 러시아 문학인 데다가 스토리도 썩 내키지 않았으며 뭣보다도 햄슨이 아주 잘했다고 평가받는 작품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작품이 좋은들 내가 파는 사람이 잘해야 볼 의욕이 생기지ㅋ<- 뭘 파든 이런 기준으로 파면 안 됩니다


자아도취 해서 남의 진심 내치고 선생질하다가 사고 치고 뒤늦게 자기 발등 뼈아프게 찍는 역할이라 숨 쉬듯이 잘하실 텐데 왜 평이 그냥 어, 뭐, 잘했어요 수준인가 궁금하긴 한데 아무래도 러시아 삘이 안 와도 너무 안 와서 그런 게 아닌가 짐작해본다. 짐작으로만 그치는 것은 남아있는 영상은 조각조각인 데다가 개중에 하나는 연출이 좀 괴상해서 오네긴이 뒤늦은 고백을 하는 순간을 타티아나의 남편이 목격하고 있다 보니 오네긴이 후회에 몸부림치건 말건 타티아나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오네긴 따위 뭐라든 말든 그만해ㅠ라는 생각만 들었음. 타티아나가 도망치듯이 남편에게 달려가다 보니 오네긴을 차버리는 순간의 사이다도 당연히 없었고. 그나마 정식 앨범이라고 하나 나온 건 러시아어 원본이 아니라 영어 번역본이라서 셧업아일킬유하는 오네긴은 깨더라. 번역을 보니 러시아어로도 그 말은 맞긴 하던데 뭔가... 좀... 그랬음.





멀쩡했던 연출은 이런 느낌의 오네긴. 영상이 안 남아있는데 어떻게 연출이 멀쩡한 줄 아는가 하면 다른 배역으로 영상이 나와 있어서. 그건 좋음. 로버트 카슨 프로덕션이라 남자 배우들 옷 하나는 예쁘게 입혀줬다. 렌스키 열 받게 하려고 올가와 춤추는 장면인데 이 올가가 13잘츠의 에볼리. 오네긴을 보는 올가 표정이 이러니 렌스키가 결투를 하자고 덤빌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지만 이때 렌스키가 표트르 베찰라였던데 올가 다시 생각해봐...;

 

그래서 오네긴은 관심에서 멀어진 채로 음 그런 작품을 거치긴 거쳤군 했는데 약을 사는 타이밍은 예상치 못하게 오는 법.


연초의 줄리아드 마스터클래스에서 예쁘고 귀엽고 목소리도 예쁘고 키까지 큰(!) 테너 학생이 들고나온 곡이 오네긴 중 렌스키의 아리아였던 거라. 오올 귀여운 학생이다ㅋ 불순한 감상을 하고 보는데 해설이 재미있어! 렌스키가 사소한 걸로 결투하다가 죽는 건 알았는데 이런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였구나. 울면 안 되는 거였어? 자기 연민 없이 마주하는 운명의 시간이라니 좋잖아? 거기다 작품 외적으로 하는 얘기들도 좋았고. 마스터클래스 하다가도 신나면 하이해지시는데 여기서도 계속 시끄럽게 구시는 게ㅋ 기분 좋으셨던 듯. 이 학생 목소리 예쁘다고 계속 칭찬을 하시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하이델베르크 마스터클래스에도 데려가셨더라. 이제 스물네 살이면 한 10년 기다리면 되려나.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본 오네긴 중에 좋은 건 정말 많았는데 비주얼 적으로 제일 예쁘다 했던 건 이거. 








1959년에 영화로 만들어서 연기는 배우가 하고 노래는 성악가가 불러서 립싱크ㅋ를 한 건데 오네긴도 책은 안 읽었지만 딱 오네긴같이 생긴 비주얼이고 타티아나도 원래도 예쁘고 공작부인으로 재회했을 때도 예쁘지만 렌스키가 너무 예쁨ㅋㅋㅋㅋㅋ





진짜 젊다 못해 어린, 기숙학교 갓 벗어난 느낌의 시인인데 싸우고는 망토 두르고 썰매로 달려갈 때도, 결투 전날 밤 동이 트는 걸 보면서 아리아를 부를 때도 예뻤지만, 결투 직전에 친구에게 총을 겨누게 되다니 하는 듀엣을 부를 때 아련아련하게 깔리는 두 사람의 회상씬까지 80년대 고전순정만화삘 충만한 게 너무 예뻐서 고전만세 소비에트연방만세 한참 흐뭇하게 봤다. 







오페라에서는 학교에서 올리는 게 아닌 다음에야 비주얼적으로 이렇게 어리고 예쁜 렌스키는 올라올 수가 없고 거기다 아무리 잘생기고 예쁘다 한들 진짜로 노래를 하면서 이 영화처럼 망가지지 않는 얼굴로 나오기는 불가능할 거라서 더 색다른 느낌이었달까. 노래 자체는 옛날 엘피판 듣는 느낌이 나서 그게 또 비주얼이랑 어우러져서 흠뻑 빠졌더랬음.


비주얼적으로는 이 렌스키를 제일 좋아하고 음악적으로는 정말 많은 훌륭한 테너들이 렌스키 아리아를 부른 게 남아있는데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렌스키는 이분. 








             

Kudà, kudà, kudà vi udalilis,      

vesni moyei zlatiye dni?                       


Shto dyen griadushki mnye gatovit?             

Yevo moi vzor naprasna lovit:                   

v glubokoi ts'me tayitsa on!                    

Nyet nyuzhde; prav sudbi zakon!                 

Paddu li ya, streloy pranzyonni,                

il mima proletitona,                            

vsyo blaga; bdieniya                            

i sna prikhodit cias apredelyonni!              

Blagaslovyen i dyen zabot,                      

blagaslovyen i ts'mi prikhod!                   


Blesnyeot za-utra luch dennitsi , 

zayigrayet yarki dyen, 

a ya, bit mozhet, ya grobnitsi

saiduv tayinstvennuyu syen!

I pamyat yunovo poeta 

poglatit myedlanneya Lyeta.

Zabudet mir menya ; no ti! ti!... Olga...


Skhazi, pridyosh li, dyeva krasoti,

slezu prolit nad rannei urnoi

i dumat: on menya lyubil!

On mnye yedinoi posyatil

rassvyet pecialni zhizni burnoi,

akh, Olga, ya tebya lyubil!

tebe yedinoi posyatil

rassvyet pecialni zhizni burnoi,

akh, Olga, ya tebya lyubil!


Serdyechni drug ,zhelanni drug, 

pridì, pridì! zhelanni drug, 

pridì, ya tvoi suprùg, 

pridì, ya tvoi suprùg, pridì, pridì! 

Ya zhdu tebya, zhelanni drug, 

pridì, pridì; ya tvoi suprùg!

 

Kudà, kudà, kudà vi udalilis, 

zlatye dni, zlatye dni moyey vesni?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가 버렸나,

나의 젊음의 황금빛 나날들은?


미래에 날 기다리는것은 무엇인가?

나의 시선은 허공을 헤매고 있구나

모든 건 암흑 속에 가려져 있다!

무슨 상관이람: 운명의 법칙은 공평한데.

난 추락해야 할 것인가. 화살에 찔려서,

아니면 멀리 날아가게 해야 하나

모든건 하나로구나: 

잠들든지, 깨어있든지

축복하라 낮이 지남을

축복하라, 역시, 어둠이 오는것을


이른 아침에 여명이 빛나고

날은 밝아오기 시작한다

아마도, 난 들어가겠지

무덤의 신비한 그늘속으로

젊은 시인의 기억은

레테의 강의 느린 흐름 속으로 삼켜질 것이고

세상은 날 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올가.


말해요, 아름다운 아가씨 이리로 와서

납골단지에 눈물을 흘려줘요.

"나에게만 오로지 그가 헌신했다."고.

"그의 폭풍치는 슬픈 새벽에 - 

인생의 주사위를 던졌다."고!

오, 올가, 난 당신을 사랑해.

오직 당신에게만 날 바쳤다오.

나의 폭풍우의 슬픈 새벽에 인생을 걸었다오.

오, 올가 당신을 사랑해요.


내 진정한 사랑이여. 나의 소원이여,

이리와요, 오, 와주오, 나의 열망이여, 

난 당신의 약혼자, 와줘요.

이리와요,  난 당신의 약혼자, 이리와요, 오, 와주오, 

난 당신을 기다리리다. 나의 소망이여.

이리와요, 오, 와주오, 난 당신의 약혼자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가 버렸나,

나의 젊음의 황금빛 나날들은?




호프만 이야기 복습하면서 처음 본 닐 쉬코프. 

처음 뵙는데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내가 정말 무지 아주 몹시 싫어하는 햄슨 다큐 비슷한 영상에 나오셨더라. 다시 보니 - 그렇다, 정말 무지 아주 몹시 싫어하지만 못 지웠음- 그 무렵이 햄슨이 빈에서 오네긴 롤 데뷔할 때였고 닐 쉬코프가 렌스키였음. 그때는 앗 저 작고 수줍음 타는 아저씨는 누구지ㅎㅎ 했는데 이런 렌스키셨을 줄이야ㅠㅠ   


정말 쟁쟁한 러시아, 동유럽 테너들이 부른 렌스키가 많고, 다 좋긴 좋은데 왜 이 분 렌스키가 제일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일 좋은 것이다. 진짜로 추울 때 들으면 속이 너무 추워질 렌스키니까 딱 지금 같을 때 실컷 들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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