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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4막 1장 본문

Don Carlo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4막 1장

neige 2014. 10. 18. 01:00


+ 앞의 글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3막 2장



펠리페에게 아주 긴 밤이 되는 4막 1장. 실제 길이도 길다; 


낮의 화형식장에서 4막 1장의 배경은 펠리페의 서재로 옮겨진다. 아버지 카를 5세가 필드형 황제였던지라 몸소 여기저기 나섰던데 비해서 펠리페는 광대한 왕국을 다스리면서도 서재 밖으로 안 나갔다는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 물론 펠리페가 평생 밖으로 안 나갔다던 은둔형 외톨이 왕이나 그런 건 아니고 젊을 때는 플랑드르도 오가고 했는데 아버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랬다는 이야기. 그래도 본인이 직접 나가지 않아도 서류상으로 통치가 가능하게끔 시스템을 만들어놨다는 건 흥미롭지만 펠리페 사후에 이 시스템은 무용지물이 되고 스페인은 쭉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연출에 따라 서재의 모습도 각기 다르지만 13잘츠의 차가운 색조는 펠리페의 서재에도 마찬가지다. 왕의 서재답게 붉은색과 금색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희고 높은 벽에 모로코풍의 푸른 타일이 들어갔다. 펠리페의 책상을 덮은 천도 채도가 낮은 자주빛이라서 화려하다기 보다는 스산하고 외로운 느낌. 잘츠부르크 축제 극장 무대가 워낙 가로로 긴데 그 무대의 한 쪽 끄트머리만 활용하고 나머지는 어둠으로 채워버린 공간적인 배치도 펠리페의 외로움을 시각적으로 한 번에 다가오게 해줘서 좋았다. 내가 현장에서 보고 있는 입장인데 왼쪽 좌석에 앉았다면 짜증이 일었겠지만ㅋ 






거대한 왕국을 통치하는 왕의 서재에서 펠리페가 홀로 부르는 노래는 왕의 노래가 아닌 인간의 노래, 늙어가는 남자의 노래, 베이스의 아리아로 유명한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네Ella giammai m'amo.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실제로는 이 시점에서 펠리페는 40대의 한창 나이였던 것을 실러가 60대로 올려잡았는데 베르디 역시 그 설정을 따라서 자신 앞에 놓인 것이 쇠락과 죽음뿐인 왕이 괴로워하는 노래를 만들어 준 것. 





왕이기만 했다면 흔들릴 리도 없었겠지만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있어도 인간인지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고, 인간의 마음을 알 수 없어 외로워하면서, 차갑고 어두운 죽음이 바로 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걸 두려워하는 이 노래는 베이스의 저음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구나 알게 해 준 노래. 


희곡에서는 알바 공작과 도밍고의 참소로 흔들린 펠리페가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하면서 괜히 옆에 있는 레르마에게 너 아직도 집에 안 갔냐, 집에 가면 네 아내랑 아들이 서로 안고 있는 걸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악담까지 할만큼 괴로워하고, 엘리자베타가 낳은 딸 클라라를 안고 들여다보다가 날 닮았는데 카를로놈 딸일리가, 아니지 카를로는 날 닮았는데...? 그럼 설마!하면서 딸을 밀쳐내기까지 할 정도로 몰린다. 후에 외로운 펠리페의 곁을 지킨 자식이 바로 그 클라라였다는 걸 같이 생각하면 더 안타까운 의심. 사랑했던 아내도 미워했던 아들도 모두 죽고 없는데 그 아내가 낳은, 아들과 자신을 닮은 딸을 곁에 둔 펠리페의 마음은 어땠을까.    


펠리페 정도의 왕이라면 알바와 도밍고의 속셈쯤은 꿰뚫어보고 역으로 이용도 할 줄 알아야하고 정략적인 동맹협약의 결과로 얻은 아내에 대해 진정한 애정과 질투를 느낄리도 없어야 하지만 실러가 그리는 펠리페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이고 연약하다. 알바와 도밍고의 속셈을 짐작하지만 참소에는 아파하며 알바가 거짓으로 고한 카를로와 엘리자베타의 불륜에 알바를 죽이고 싶어할정도로 분노하는 인간. 카를로는 펠리페가 인간적인 면은 전혀 없는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로드리고에게 징징거리지만 실은 펠리페 역시 인간일 뿐이다. "왕이라고! 겨우 왕이며, 다시 왕!-공허하고 텅 빈 메아리보다 더 나은 답은 없소? 나는 이 바위를 치며 뜨거운 갈증에 물을, 물을 달라고 요구하건만. 그는 내게 이글거리는 황금을 주는구나." 레르마에게 한탄하는 펠리페의 말은 바로 이런 외로움과 고통을 보여주는 말. 아무도 모르던 펠리페의 이런 인간으로서의 외로움을 보아준 사람이 바로 로드리고다. 






후작    하지만 유감입니다!

마마께서 창조주의 손에서 만들어진 인간을 마마의

손길이 만든 작품으로 바꾸고는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피조물에게 마마를 

신이라고 제시하셨으나-여기서 마마는 뭔가를

못 보신 겁니다. 마마 자신이 아직 인간이라는 걸요.

창조주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죠. 마마는 죽어야

할 존재로서 계속 고통받고, 계속 열망하십니다.

마마는 공감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떨면서-기도드릴 수 있을 뿐이지요!

유감스러운 교환입니다! 자연을 불행하게

뒤튼 일이지요! 마마는 인간을 자신의

현악기로 만들어버렸으니, 누가 마마와

함께 화음을 맞출까요?


     (맙소사, 이자는 내 영혼을 꿰뚫어 본다!)






오페라를 보고나서 희곡 속 로드리고의 대사를 읽었을 때 로드리고가 더 좋아졌더랬다. 왕을 증오하고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 부자연스러운 군림으로 인해 신과 같이 높아졌지만 그 본질은 필멸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는 사람, 왕관 아래의 외로운 영혼을 보는 사람이라니 대담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구나. 이런 사람이 이뤄내는 혁명은 괜찮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하지만 실러는 해피엔딩을 그리려던게 아니었으니까...;ㅁ;


오페라의 로드리고와 펠리페의 독대에는 이런 세심한 대사는 빠져있지만 아리아로 표현되는 펠리페의 괴로움은 최고ㅠㅠb 이미 말했듯이 마티 살미넨의 펠리페는 남자보다는 노인이라는 특성이 더 잘 드러나는데 바로 앞에서 화형식 앞에서 신의 영광을 찬양하던 그 왕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 둥글어진 노인의 어깨와 휑한 정수리와 어울려서 여기의 그녀는 날 사랑하지 않네-에서 극대화되면서 연민이 몰려온다


이렇게 아내와 아들을 의심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아들놈이 사고를 쳐놨으니 또 수습을 해야겠지. 여기서 드디어 등장하는 최종보스, 대심문관. 





원래 희곡에서 대심문관은 정말 가장 마지막에 가서야 등장한다. 펠리페가 로드리고의 편지에 속아서 자기 손으로 로드리고를 죽이고, 카를로 덕분에 로드리고의 진심까지 알게 되고 난 뒤에야 대심문관을 청해 카를로의 처분을 묻게 되는 것. 그래서 대심문관은 그러게 왜 그런 놈한테 반해서 이 사단을 냈냐고 내가 그럴 줄 알았고 야단을 치고, 펠리페는 로드리고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으면 왜 경고해주지 않았냐고, 그 눈을 보고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다시금 고백을 한다. 오페라에서는 일단 로드리고 죽는데까지가 너무 긴데다가 로드리고의 죽음 뒤에 펠리페가 쏟아내는 주옥같은 대사들을 죄다 잘라냈기 때문에 대심문관이 여기서 먼저 등장하고 로드리고의 죽음 뒤에는 희곡과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는 차이가 있다. 사실 실러의 주제는 바로 그 펠리페의 대사 속에 들어있던 것 아닌가 싶어서 그 대사가 전부 잘렸다는게 너무나 아쉽지만 오페라에서 보여주는 대심문관과 펠리페의 대립, 베이스와 베이스가 부딪치는 힘과 무게는 또 좋기는 좋다.  


카를로의 처분을 묻는 펠리페는 이 시점에서 그렇다고 바로 아들을 죽여버릴 작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왕이고 인간이고 아버지이고 또 신앙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을 죽인다는 것이, 아무리 그 아들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댔더라도 비인간적인 일이라는 괴로움은 가지고 있는 것. 


추방을 명할지 혹은 사형을 내릴지 고민하면서 펠리페는 대심문관에게 만일 내가 아들을 죽이더라도 왕으로서 정당할 수 있겠느냐고 정치적인 지지를 묻고 나서 그리고 다시 아들을 죽인 아비라는 사실을 기독교인으로서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데 대심문관은 단호하게 한 인간의 피보다는 세계의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답한다. 대심문관이 말하는 평화란 결국 2막 2장의 독대에서 로드리고가 무덤뿐인 평화, 끔찍하고 두려운 평화라고 일컬었던 그 평화다. 하느님께서도 인류를 위해 당신 아들을 희생시키지 않으셨냐는 답을 보고 있으면 참 새삼 그러라고 보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인간이란...싶어진다. 심슨에서 하느님이 너네가 내 아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애가 지상에 다녀온 뒤로 이상해졌어-하는 그 짤 갖다 붙이고 싶어짐. 돈 카를로 중에 바로 이 부분, 인류를 위해 희생한 예수의 이미지를 중심 이미지로 세워서 무대 중앙에 거대한 십자가에 못 박힌 거대한 예수의 발을 배치한 연출도 있다. 무대미술로는 상당히 흥미롭지만 무대 이미지에 사람이 너무 묻히는 느낌이라 난 별로 안 좋아하는 버전임;; 대심문관의 강경한 답에도 펠리페는 확실히 태도를 정하지는 않고 대화를 끝내려는데 대심문관 쪽에서 더 할 말은 없냐고 묻는다. 


여기가 희곡과 오페라가 다른 부분. 오페라의 대심문관은 이제껏 이단이 침범할 수 없었던 신성한 스페인에 위험한 사상을 퍼뜨리려는 자가 있으니 왕의 벗, 왕이 신뢰하는 이가 바로 그 유혹하는 악마라고, 그의 해악에 비하면 카를로의 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공격한다. 대심문관으로 멀리 있는 이단을 처단하는데 바빠 왕을 살피는 것을 잊었다고 자신의 허물을 말하는 척하면서 내가 안 보는 틈에 딴 생각을 했구나 펠리페를 나무라는데 여기에 대한 펠리페의 답은 이렇게 괴로운 삶, 인간에 둘러싸였음에도 공허한 날들 가운데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찾아헤맸고 마침내 그 한 사람을 찾아냈다는 것.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빤히 아는 입장에서는 이런 펠리페가 안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것이다. 그러나 펠리페를 안스러워할리 없는 대심문관은 재차 묻는다. 어째서 한 인간이란 말입니까. 한 인간이 왕과 동등하다면 무엇때문에 전하는 왕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까.


희곡에서 이 부분에 해당하는 대사는 이렇다.  






대심문관    무엇하러 인간을? 인간이란 그대에게는 

숫자에 불과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을. 

(...) 그대가 공감이 그리워 흐느낀다면, 세상에 

그대와 같은 사람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그대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줄 셈이오?  






앞에서 인용한 로드리고가 왕을 보는 눈과 뚜렷하게 대비가 되는 대사다. 사상적으로 가장 극단에 서 있는 로드리고와 대심문관의 생각의 차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간 펠리페가 걸어왔던 왕의 길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여기에서 드러난다. 더불어 펠리페가 어째서 로드리고에게 그렇게 반할 수 밖에 없었는가도 실감이 나고. 왕정의 모순이 드러나는 말이기도 한데 사실 그렇잖아? 단순히 누군가의 아들딸, 누군가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고귀한 인간이어서 남 위에 서는 위치에 있는 거라면 같은 인간으로서의 공감을 바랄 수 없는 게 맞는 말이지. 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체제란 말인가. 그러니까 공화정 만세.


오페라에서도 카를로의 극형을 지지하는 말에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일지언정 대놓고 그래도 아들인데 어떻게 죽이라는 거냐 강력하게 반발하지는 않았던 펠리페가 로드리고를 내놓으라는 대심문관의 말에 괴로워하면서 결국에는 줄곧 대심문관을 부르던 존칭mio padre을 버리고 수도사frate라고 칭하면서 격하게 화를 내며 거부하는 것도 그래서 이해가 가면서도 안타깝다.





펠리페가 절대 안 된다고 책상을 치고 일어서는데 2막 2장에서 펠리페가 내민 손을 보고 뒷걸음치던 로드리고가 생각나서 눈물이... 로드리고를 감싸는 펠리페에게 노한 대심문관은 조심하라고 내일이라도 왕을 종교재판에 세울 수도 있다고 협박하고 펠리페는 그만하라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느냐고 계속 반항하고 결국 대심문관은 두 명의 왕을 세운 내가 이러려고 그렇게 애써왔느냐, 이제껏 쌓아온 것을 모두 무너뜨릴 생각이냐고 분노하며 왕의 앞을 떠난다. 가려는 대심문관을 불러세운 펠리페는 다시 대심문관을 mio padre라고 부르면서 수그러진 태도를 보인다. 평화를 원하는 펠리페에게 확답은 주지 않고 대심문관은 가버리고 홀로 남은 펠리페는 왕은 항상 제대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단 말인가-종교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이 순간의 펠리페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두 다 버릴 수 있다는 카를로의 철없음이 차라리 부러웠을지도. 





희곡의 대사를 거의 그대로 옮겨왔지만 오페라에서는 전후 순서가 달라졌는데, 원래는 로드리고를 화형시키지 않고 왕이 직접 죽였다고 대심문관이 펠리페를 나무람->펠리페가 외로워서 그 한 사람을 원했다 고백함->대심문관이 그러게 왜 그런 말에 넘어갔냐 야단침->펠리페가 화냄->대심문관이 화냄->펠리페가 평화를 청하면서 카를로의 처벌에 대해 의논함, 이런 순서다. 하지만 오페라에서는 카를로의 처형에 대한 의논을 먼저하고 아직 살아있는 로드리고의 죽음을 원하는 대심문관에게 펠리페가 반발하는 걸로 순서가 바뀌었다. 그야 아직 로드리고가 안 죽고 살아있으니까 바꿀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이렇게 순서를 바꾸면서 정치적, 종교적인 지지가 뒷받침이 되면 아들도 죽일 수 있는 펠리페가 로드리고만큼은 대심문관의 격노를 불러올만큼 지키고 싶어했다는 게 되니까 난 아주 좋다ㅋㅋ 게다가 펠리페가 교회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한탄했다고 해서 이 시점에 로드리고를 포기한 건 아니기 때문에. 13잘츠의 펠리페는 대심문관이 일어나기 전에 더 듣기 싫다는 듯이 자기가 직접 문을 열고 대심문관의 수행원들에게 데리고 나가라고 손짓해서 내보내기까지 하니까. 펠리페가 말하는 평화는 로드리고를 줄테니 예전처럼 잘 지내자는 건 확실히 아님. 아무리 봐도 13잘츠의 연출은 카를로/로드리고<-펠리페에 중점을 둔 것 같다...내가 로드리고를 좋아해서 그런게 아니라 펠리페가 보여주는 감정의 온도가 로드리고가 연관되어 있을 때 제일 뜨거움ㅠㅠ


13잘츠 돈 카를로의 대심문관은 Eric Halfvarson인데 내가 이 분이 대심문관으로 나오는 걸 본 게 네 번이다. 이름만 보고 마티 살미넨처럼 북유럽계인가 했지만 국적은 미국. 봤던 돈 카를로마다 대심문관 분장이 달라서 한 분이 멀티 뛰는 거란 인식이 그렇게까지 강하진 않은데 아무리 오페라 배역이 돌고 돈다해도 참 반갑기도 하고 아니 여기도 또? 싶기도 하고ㅋ 가장 강렬했던 건 96 샤틀레에서였는데 내가 본 대심문관 중에 최고로 무서웠음 비주얼도 그렇고 연출이ㄷㄷㄷ 96샤틀레 얘기도 해야하는데 언제하지( mm 아무튼 13잘츠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으셨다.   


대심문관이랑 한판한 것만으로도 힘든 펠리페의 괴로운 밤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으니 이번에는 엘리자베타가 뛰어들어온다. 보석함이 없어졌다고 왕의 정의를 바란다는 엘리자베타에게 냉소하면서 보석함을 꺼내보이는 펠리페. 1막 퐁텐블로에서 카를로가 엘리자베타에게 건넸던 초상화를 들어보이면서 부정의 증거를 잡았다고 날 속인 걸 밝혀내기만 하면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불쌍한테 참 찌질하고 그래서 불쌍하지만 엘리자베타는 어쩌다 이런 집안에 시집을 왔나 싶으면서 1막에서 프랑스 백성들이 젊은 남편을 만나 사랑받으며 사시길 축복했던 것도 오버랩되고 그러함. 물론 바로 그 백성들이 30분도 안 지나서 우리에게 평화가 오도록 펠리페랑 결혼해 달라고 하긴 했지만. 

    

연출에 따라 여기서 펠리페와 엘리자베타의 부부로서의 관계가 어떤지가 보이는데 13잘츠의 펠리페-엘리자베타는 부부로서의 느낌보다는 왕과 왕비로서의 관계가  더 두드러진다. 엘리자베타가 펠리페에게 요청할 때부터도 사랑받는 아내가 나이 많은 남편에게 바란다기보다는 왕비가 왕에게 호소하는 느낌이고 펠리페 역시도 내가 당신에 대한 애정으로 약해졌던 것을 믿고 날 속이려 드느냐고 하는 가사가 무색하게 엘리자베타에게 말랑한 애정을 보여준 적이 있는 있었던가, 애정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질투 혹은 내것을 젊은 아들이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분노가 더 컸던 게 아닐까 싶은 모습. 2막 2장의 로드리고와의 독대 장면에서 말했듯이 펠리페가 로드리고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몽상가라고 하는 것만큼의 부드러운 모습을 엘리자베타에게는 보여준 적이 없어서.








결백을 주장하던 엘리자베타가 도무지 들어먹지를 않는 펠리페를 딱하다고 하자 펠리페는 간통을 저지른 아내 주제에 날 동정하냐고 비웃고 기가 막힌 엘리자베타는 기절하고 마는 이 장절한 부부싸움의 현장. 원래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고 그 중에서도 부부싸움이 으뜸이라. 사랑과 전쟁이 괜히 장수했던게 아니잖나. 왕과 왕비가 보여주는 부부싸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재미있는데 찌질하고 안타까움. 희곡에서는 엘리자베타가 딸을 안고 나가다가 넘어져서 얼굴에서 피가 나고 펠리페가 기겁해서는 날 얼마나 망신시키려고 이러냐고 빨리 일어나라고 부축해주기까지 함. 그래도 오페라에서 다른 펠리페들은 엘리자베타가 쓰러지는 시점에서 일단 잡아주거나 걱정을 하기라도 하는데 13잘츠 펠리페는 그런 거 없이 쓰러지도록 내버려두고는 소리쳐 사람을 부른다. 뛰어들어 온 사람은 로드리고와 에볼리. 





보석함을 훔쳐 왕에게 준 장본인인 에볼리는 쓰러진 엘리자베타를 보고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후회하는데 로드리고는 펠리페에게 정색하고 말한다. 세상의 절반을 다스리는 왕께서 그 광대한 왕국에서 다스리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가 전하 자신이란 말입니까? 이제까지 카를로만 미쳤다고 비난할 수 없겠다 싶을만큼 이성을 잃고 분노를 터뜨리던 펠리페가 로드리고의 말과 눈에 바로 정신을 찾는 것을 보면 또 안타깝지 그지 없는 거라. 희곡에서도 펠리페의 의심을 그치게 하는 사람은 로드리고였지만 에볼리의 편지라는 물증이 있었던 데 비해서 오페라의 로드리고는, 특히 13잘츠 로드리고는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말 한마디 만으로도 펠리페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보이니까 바로 앞에서 펠리페가 괴로움 속에서 신에게 간절하게 원하던 한 사람, 진실을 알려줄 사람이 로드리고라는 게 보이고, 이렇게 믿는 사람이라 대심문관과 맞서면서까지 지키려고 했구나 하는 것도 절절하게 느껴진다그러니까 로드리고도 펠리페한테 자신이 미치는 영향력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로드리고의 말에 정신을 차린 펠리페가 엘리자베타의 결백을 믿으면서 시작되는 4중창도 무척이나 좋다. 베이스와 바리톤, 소프라노와 메조 소프라노가 모두 함께하는 음악적인 풍부함도 좋고 펠리페와 에볼리의 후회가 엇갈리는 가운데 로드리고는 이제 때가 왔다고 스페인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내가 죽을 때가 됐다고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아냐 그러지 마요 스페인이 행복해지려면 카를로를 버리고 펠리페를 택해야죠 펠리페를 택하지 않아도 아무튼 카를로는 버려 이 사람아 정신 좀 차려봐봐ㅠㅠㅠㅠㅠ 안타깝고 여기에 정신을 차린 엘리자베타가 여기서 나는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슬퍼하는 걸 들으면 또 안스럽다


13잘츠에서 이 부분 연출이 좋은 게 펠리페는 줄곧 엘리자베타쪽을 바로 보지 못하고 노래하다가 엘리자베타가 깨어난 걸 보고 그쪽으로 가려다가 로드리고가 한 발 앞으로 나서는 서슬에 다시 물러나고, 에볼리는 엘리자베타를 보면서도 구석에서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다가 차츰 다가서고, 로드리고는 다가올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찬 눈으로 노래하면서도 엘리자베타에게  연민을 드러내면서 몇번이나 다가려다가 멈칫하는 게 이 불행한 사건을 대하는 각자의 심경이 보여서 좋음. 







이미 로드리고에게 반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라 로드리고가 스페인의 행복을 위해 내가 목숨을 바칠때가 왔구나 노래할 때 눈 반짝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거짓말 하지 말아요 스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카를로를 위해서겠지ㅠㅠ조명을 어떻게 줬길래 저렇게 눈이 반짝반짝하냐 반칙이다ㅠㅠ 벌써부터 그렇게 웃지마요ㅠㅠ 스페인의 행복한 미래따위는 없음ㅠㅠ 기껏 목숨 내놓고 차려준 상 카를로놈이 엎어버리는 걸로도 모자라 위에 재까지 뿌림ㅠㅠ 이러고 있지만; 저 위에 펠리페 대하는 표정이랑 차이가 진짜... 펠리페가 스페인의 행복한 미래였으면 로드리고는 펠리페를 이렇게 볼텐데, 그럼 펠리페는 정말로 왕국의 절반을 내줘도, 온 유럽의 저주를 받아도 아까워하지 않았을텐데ㅠㅠ 온 얼굴로 펠리페는 내 미래가 아님 카를로가 내 미래임 말하고 있는 이런 로드리고라니... 이 행복한 눈이 바라보는 스페인의 행복한 미래의 왕이 카를로라니ㅠㅠㅠㅠㅠㅠ       





펠리페가 먼저 나가버리고 로드리고는 엘리자베타에게 결국 다가가지 못한 채로 에볼리를 한 번 노려보는 걸로 가버리고 나면 에볼리의 고백타임이 시작된다. 보석함을 훔친 범인이 자기라는 에볼리의 고백에 엘리자베타는 충격을 받지만 카를로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에볼리의 말에 그런거였다면 이해한다고 하는데 엘리자베타 대인배ㅠㅠㅠㅠ 






보고 있으면 카를로보다는 엘리자베타가 차라리 더 로드리고가 바라는 왕의 재목에 가까움. 고결하고 인내할 줄 알고 관대하고 용기있으면서도 로드리고를 이해하고 그 이상을 지지해주고 로드리고의 한계까지도 읽어내는 사람. 로드리고의 희생은 아름답고 슬프지만 그것이 옳은가, 정말 스페인을 위한 길이고 자유를 위한 길이었냐고 한다면 아니다. 로드리고는 이 사단이 벌어진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그래서 엘리자베타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13잘츠의 로드리고가 더 좋은 것이다, 그냥 단순히 좋은 사람이라 엘리자베타를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님- 계획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해져버린 이 게임에서 어떻게 해서든 카를로를 구해내야 한다는 절박함에 이성이나 판단력을 잃은 채 그냥 '자기 이념에 자기를 던진 것'. 실러가 그린 로드리고는 아름다운 이상을 말하는 인간이지만 완벽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작중에서 엘리자베타가 그 점을 간파한다.





왕비    아니! 아니죠!

당신은 숭고하다고 부르는 이런 행동으로

스스로 뛰어들었어요. 부인하지 마세요.

전 당신을 알아요.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

그것을 갈망했죠. 천 명의 심장이 터진다 한들

당신의 자부심만 즐겁다면 당신께 무슨 상관이겠어요?

오, 이제야-이제야 나는 당신을 알겠네요! 당신은

오로지 경탄을 받기 위해서만 애썼죠.





그러나 희곡에서도 오페라에서도 엘리자베타를 정치 쪽에는 배제시키고 사랑과 숭배의 대상으로만 만들어버려서 로드리고는 엘리자베타를 우러러보기 좋은 성녀상으로 여겼지만 로드리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결말은 로드리고가 이 시점에서 펠리페의 마음을 휘어잡아서 카를로를 치워버린 다음 펠리페를 남모르게 독살시켜버리고 펠리페와 엘리자베타의 딸인 클라라를 여왕으로 올려서 모후가 된 엘리자베타와 로드리고의 공동통치 체제로 가는 거다. 프랑스는 이 시기 자국 사정이 엉망이라 엘리자베타가 섭정 모후라도 스페인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을거고 어차피 로드리고는 카를로만 사랑하니까 로얄어페어처럼 왕비랑 혁명가랑 바람나서 스캔들 터질 일도 없다는 면에서도 완벽함. 카를로 죽이는 게 너무 마음 아프다치면 역사대로 어디 가둬놓고 그냥 하루에 한 번 엘리자베타랑 이야기만 하게 해주든가. 펠리페 독살 혐의를 카를로한테 씌워버리면 일석이조겠네. 이야, 카를로가 이렇게 쓸모있을 수도 있다니. 로드리고의 영혼과 양심과 카를로에 대한 사랑만 버릴 수 있다면 완벽한 구도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 있으면 로드리고가 로드리고가 아닌거라 촉 승상님이 아두 폐위시키고 제위에 올라 삼국통일하는 상상마냥 부질 없는 생각이고 오페라로 돌아와서 에볼리는 엘리자베타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대신 고백을 계속한다. 엘리자베타를 위해서라면 덮어뒀어야 했을 죄, 간통의 죄는 펠리페와 자신이 범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하는 이런 면 때문에 에볼리가 좋은 것이다. 엘리자베타는 여기에는 정말로 충격을 받아서 에볼리에게 주었던 십자가를 돌려받고 궁을 떠나 수녀원에 들어가 반성하는 삶을 살라고 명하고 떠나는데 여기서 엘리자베타가 보여주는 경멸과 분노가 또 여왕답다. 





엘리자베타가 나가버리고 시작되는 에볼리의 아리아가 O don fatale. 흔히 저주받을 내 미모여-라고 번역이 되는데 모든 작품의 절세미인들이 그러하듯 종종 현실의 비주얼과 가사의 괴리감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13잘츠의 에볼리는 내 취향의 강한 미인인지라 난 마음에 들었음ㅋ 





여러 전설들이 노래해주셨고 메조 소프라노의 아리아로 워낙 유명하지만 솔직히 가사 자체를 놓고보면 썩 마음에 드는 아리아는 아니다. 에볼리의 문제가 과연 그 미모와 미모가 가져온 허영과 오만때문이었느냐, 나아가서 그런 허영심과 오만함을 가진 것이 그렇게 죄였냐 한다면 난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예쁜 여자가 화근을 부른다는 뻔한 시선이라고까지 하면 심하게 나간 걸 수도 있겠지만...100년도 더 이전 시대를 산 아저씨들이 만든 노래를 가지고 새삼 뭐라고 하기도 참 뭣한 것이니 관두자. 그래도 왕비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을 드러내는 부분은 좋지만 그건 원래 희곡에 있는 거잖아?  


희곡을 읽었기 때문에 에볼리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더 자세하게 알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결국 죄가 있었다면 사랑했다는 게 죄였던 거고 그게 죄라면 돈 카를로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죄없는 자는 대심문관 말고는 없지 않나 싶고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건 에볼리 자신의 미모나 성격보다는 카를로놈의 잘못이 반은 넘으니까. 더해서 로드리고의 잘못도 나머지 지분의 삼분의 일은 넘을듯. 


이 노래를 부르는 에볼리가 좋은 건 자기 결점을 알고 후회하고 반성할 줄 아는데 자기 죄에 눌려서 자기 연민에 빠지는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13잘츠 에볼리가 이 부분을 씩씩하게 불러줘서 진짜 좋음. 언니 사랑해요♡ 






잘못을 고백하고 -물론 그 고백이 상대에게 상처를 제대로 줬으니 말하는 게 옳았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반성하고 거기에 행동할 줄 아는 이런 사람을 미모때문에 오만해지고 사랑에 눈이 멀어 파멸을 불러온 팜므파탈 취급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솔직히 자기 반성과 개선이 있다는 점에서는 카를로놈보다 나은데. 로드리고가 아무리 우리 왕자님의 영혼은 고귀하고 순수하다고 반발해도 내 눈에는 그러함. 그러니까 카를로 버리라고 하고 싶지만 이 시점의 로드리고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불러올 가짜 편지를 써서 펠리페 손에 들어가게 하고 있겠지. 그 편지 읽고 펠리페는 운단 말이다. 눈물로 아버지의 사랑과 화해를 원하던 카를로에게 품위없는 모습을 당장 치워버리라고 경멸과 분노를 보이던 그 펠리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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