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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we fight for the right to a night at the opera now?-2 본문

Don Carlo

Do we fight for the right to a night at the opera now?-2

neige 2015. 6. 6. 03:46







루소에게 평생 연금을 주려던 루이 15세의 일화에서처럼 오페라는 왕과 귀족들에게 사랑받는 장르였다. 그러나 오페라 자체를 귀족적인 장르라고 생각한다면 프랑스 대혁명 이후 오페라는 반동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폐기당했을 것이라 예상하기 쉽다. 라모나 륄리처럼 혁명 이전 궁정음악가로 프랑스 오페라를 주도했던 이들의 전통은 분명히 혁명과 함께 지워져서 최근에 와서야 재발굴되고 있고,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귀족의 저택과 극장에서 일반 대중에게 열린 장소로 나오면서 음악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고 할만큼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는데 그럼에도 오페라라는 장르 자체는 살아남았다. 후원자가 왕에서 혁명정부와 부르주아로, VIP 관객층이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바뀌었을 뿐. 


혁명정부에서는 오페라를 정치 선전의 도구로 활용했는데 발미 전투의 승리를 그린 오페라가 대표적인 사례다. 발미 전투는 라 마르세예즈가 탄생한 전투일뿐만 아니라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외침에 몰려든 의용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집혔다는 드라마틱한 사실도 뜨겁고, 프랑스 혁명의 운명을 결정짓고 덕분에 유럽사가 바뀐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으니 기념으로 그림도 그리고 오페라도 만들어 올리는 것이야 당연하다. 하지만 제목이 <공화국의 승리 Le triomphe de la République>라니 너무 정직하고 멋없지 않나. 제목 로베스피에르가 붙인 것 아닐까. 당통이면 적어도 이런 제목은 안 붙였을 것 같은데.







1794년에 출판된 공화국의 승리 악보의 표지인데 공화국 2년(1793) 1월 27일이라는 초연 날짜가 보이고 작사가와 작곡가, 안무가 이름 앞에는 시민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는 게 흥미롭다. 이 오페라의 대본을 쓴 셰니에는 앙드레 셰니에의 동생인 조제프 셰니에로 카미유 데물랭이 '비극의 여신에게 삼색 코케이드를 달아주었다'라고 평했던 혁명기 극작가이자 시인.     


인기가 없고 사양길을 걷는 장르라면 굳이 정치선전의 도구로 사용할 리가 없으니 짐작이 가겠지만 1790년대의 격변을 겪으면서도 프랑스에는 오페라를 올리는 극장이 앞다투어 생겨날만큼 오페라는 인기가 많았고,나폴레옹은 우왕좌왕하던 총재들을 치워버린 다음에 권력을 잡고 나서는 파리의 오페라 극장을 단 세 곳만 남겨두고 정리하기에 이른다. 서원도 아니고 굳이 오페라 극장을 정리해야 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폴레옹으로서는 상연되는 작품들을 수월하게 통제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공포정치를 두려워했던 사람들이지만, 민심은 변하기 마련이라 총재정부에게 등돌리고 강력한 지도자를 지지했는데, 그 지도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이 되더니 황제가 되어서 최초의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파리 시내의 모든 오페라 극장에서 황제폐하만세 만수무강하소서하는 작품들만 올렸을까? 어딘가에서는 금지된 작가들의 작품이 올라오고 또 어딘가에선 처형된 공화국을 그리워하는 오페라가 올라오지는 않았을까? 게다가 극장처럼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공간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본인들의 정당성에 불안함을 가진 자들에게는 두려운 일이니까. 차로 벽을 치는 대신 극장을 정리해준 거겠지.    


나폴레옹의 몰락과 왕정복고를 겪으면서 오페라 제작자들은 기껏 준비한 공연이 정치적 격변때문에 연기당하거나 어제는 황제를 찬양했다가 오늘은 왕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거나 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대표적인 어용 오페라로 <왕과 뱃사공 Le Roi et le batelier>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앙리 4세의 역사적인 파리 입성 일화를 가져와 어진 왕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이 오페라는 샤를 10세의 탄신 기념 작품이었다. 노골적으로 앙리 4세처럼 위대하신 샤를 10세 전하-라는 찬가. 앙리 4세가 평범한 시민으로 암행 후 뱃사공의 도움으로 잠입해 파리 시민들을 선동해 평화롭게 파리를 자기 것으로 돌렸다는 줄거리인데 역사적으로 앙리 4세가 파리를 얻은 건 개종의 결과였다는 것은 따로 보더라도 프랑스 최고의 왕으로 칭송받는 앙리 4세를 샤를 10세에게 들이대다니 아무리 복고왕정이 앙리 4세를 왕정의 상징으로 추앙하는 작업에 공을 들였다고는 해도 너무했다. 쟤네 좀 보라고 손가락질 하고 놀리고 싶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겪고 있는 일이라 쓴웃음이 먼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세종대왕에 빗대지는 않았으니 괜찮은걸까. 아냐,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미 갖다 붙였을 것 같아ㄷㄷㄷ   


1827년에 초연했으니 이때 쯤이면 즈앙은 아직 대학생 아닐 수도 있겠는데 보쉬에를 비롯한 나머지 아미들은 코웃음이나 치고 샤를 10세 생일 선물로 서프라이즈 극렬 반대 시위 준비하고 있을 때, 바오렐은 시위 가면서 공연 포스터 찢는 걸로도 모자라 썩은 토마토를 넉넉하게 준비해서 기어이 오페라 코미크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오렐에게는 다행히도, 혹은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단 13번만 공연되었을 뿐 그 뒤로 두 번 다시 무대에 올려지는 일은 없었다. 작곡가가 사실은 공화파라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았는지, 너무 얼척 없는 비유라서 그랬는지, 샤를 10세에게 이미 민심이 돌아서서 그랬는지, 혹은 샤를 10세 본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초연 3년 뒤 7월 혁명 다음에서야 그 위대한 앙리 4세도 대혁명 때 시신 목이 달아났는데 샤를 10세는 곱게 물러갔으니 팔자가 낫네 운운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봤는데 샤를 10세가 한 짓에 비하면 망한 오페라 따위는 너무 사소한 흠이라 기억조차도 못 되었을지도.    


이런 불운한 오페라가 있었으니 앙졸라스가 오페라 따위나 보러 가려고 우리가 이러는 줄 알아? 호통치는 게 당연할 법도 하다.나폴레옹 암살 시도나 베리 공 암살의 경우처럼 이 시기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오페라 극장을 예술적인 공간 보다는 암살 장소로 더 자주 이용했던 경향도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모든 오페라가 이런 비굴하고 슬픈 작품만을 올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프랑스 안팎의 많은 오페라들은 혁명적인 기운을 바탕에 깔고 있었고 대놓고 라 마르세예즈의 선율을 활용하거나 시민들을 선동하거나 해서 검열관들과 열심히 나름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두 가지다. 작품을 올리는 사람들이 이미 혁명 사상을 받고 자란 이들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위험한 선동요소가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만큼 공감을 받았다는 것. 샤를 10세의 통치기였던 1820년대 말에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주제도 강력해졌다는 것은 시대의 감정과 요구에 오페라가 무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공연 예술의 역사는 검열의 역사와 동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샤를 10세는 역시나 본인이 직접 챙길 정도로 검열에 신경을 썼다. 특히 소재 자체가 민감한 사안일때는 더욱 까다롭게 굴었는데 당시 희생양의 하나였던 오페라 마사니엘로Masaniello 가 겪어야 했던 수난은 이러하다. 1827년 말 라포르텔레와 샤를 모로가 대본을 쓰고 카라파가 작곡한 이 작품은 검열기관에 제출할 당시에는 17세기 나폴리의 어부가 스페인의 지배, 특히 부당한 세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그린 혁명 정신의 정수가 담겨있는 오페라였다. 검열당국은 대본 전체를 다시 쓸 것을 요구했고 4개월에 걸쳐 6번의 재검열을 받고 최후에는 샤를 10세가 개인적인 권한까지 행사한 결과 이 작품의 정치적 메시지는 말소당하고 체제 전복적이었던 오페라는 노골적으로 반혁명적인 작품으로 변하고 말았다. 명백하게 외세의 지배에 항거한 사건을 어떻게 반혁명적인 작품으로 바꿨는지 궁금할 정도. 세금 잘 내면 복이 온다 참고 살자 이런걸로 바꿨나? 아니면 마사니엘로가 스페인 사람들 학살하는 장면이라도 넣었나? 왕과 그 무리들로서야 켕기는 건 많고 듣기 싫은 건 많으니 입을 틀어막자는 전략을 세운 것도 당연하지만 이때 변해가는 시대를 읽고 인정하고 바뀌었어야 옳은 건데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샤를 10세가 물러날 필요도 없었겠지. 


작가와 음악가들이 부당한 검열에 분노하고 있을때 앙리 4세 대왕처럼 위대하신 샤를 10세 전하 같은 작품이 올라와서 공연이 되고 있었으니 아미들도 그 한심함에 한참 분노하고 검열 당국을 조롱했을지도. 


그런데 마사니엘로의 이야기는 이렇게 원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괴물로만 남아서 시대에 도태당하지는 않았으니 오페라 마사니엘로의 검열 제출 두 달 후, 이 작품이 한창 난도질 당하고 있던 시기에 같은 사건을 다룬 다른 작품이 당국에 제출되었다. 외젠 스크리브가 대본을 쓰고 다니엘 오베르가 작곡한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La muette de Portici 였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열당국은 스크리브의 대본을 칭찬하면서 몇 군데만 좀 고치면 되겠네-라고 자비로운 처분을 내렸다. 문제가 된 것은 시민들이여 무장하라, 민중이 주인이다와 같은 구절. 대혁명이 남긴 명확한 사실을 구태여 가리고 지우려는 당국의 아옹질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같은 사건을 다뤘는데도 이렇게 대우가 달랐던 것은 일단 대본을 쓴 스크리브가 워낙 당대의 존잘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타이틀대로 마사니엘로의 벙어리 여동생이 스페인 총독에게 농락당하고 버림 받았다는 설정을 통해 관객들의 분노를 동정으로 희석시키고, 여동생의 복수라는 명분을 쥐어줌으로써 마사니엘로의 분노를 체제를 향한 것에서 다분히 개인적인 것으로 슬쩍 틀어놓았고, 공격 대상도 외세 그 자체였지 세금 문제는 건드리지 않아서 외세와의 갈등으로 내부의 단결을 꾀하려던 당국의 니즈에 맞아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앞선 작품처럼 수난을 겪지않고 살아남아 약간의 수정만을 거쳐 올려진 이 오페라는 5막의 구조와 비극적인 결말, 마임과 발레가 함께 하는 종합예술, 엔딩에서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고 여주인공은 화산에 뛰어드는; 스펙타클한 연출을 통해 최초의 그랜드 오페라라는 음악사적인 의의를 가진다. 그렇다면 본래의 역사적인 사건이 가졌던 혁명적인 메시지는 볼거리에 묻혀서 사라졌을까? 이 작품의 초연을 보고 난 오를레앙 공작, 훗날의 루이 필리프가 남긴 평은 이렇다. "우리는 지금 화산 위에서 춤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갔지만 프랑스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이 작품은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모두의 취향에 맞아 떨어지는 작품으로 아낌을 받았다. 물론 앙졸라스의 취향에는 검열 당하기 이전의 마사니엘로처럼 직설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이 더 맞았겠지만 다른 아미들은 제법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고 와서 줄거리 개연성이 그게 뭐냐, 그래도 화산 폭발은 꽤 그럴싸했음, 하여간 요새 오페라는 러브스토리 빼면 진행이 안 되나ㅉㅉ 했을지도. 


난도질 당하고 변해버린 또 다른 마사니엘로는 검열의 눈을 피하는 불법적인 극장에서-당연하지만 나폴레옹이 극장을 세 곳만 남겨놓았다고 해서 이후로 파리에 오페라 극장이 달랑 세 곳만 있었을 리가 없다. 불법극장에서는 검열을 거치지 않는 위험한 작품들이 올라오기도 했고 일반 노동자가 15시간을 일해야 제일 싼 좌석을 살 수 있었던 합법적인 대극장에 비해서 좌석값도 5분의 1수준으로 저렴했다-온전한 모습을 가지고 그 수명을 근근히 유지해갔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미들은 굳이 그 불법적인 극장에 가서 원래의 마사니엘로를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불운한 작품이 그 후로 묻혀버린데 비해서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는 이후로 꾸준하게 무대에 올려지면서 실제 역사적인 사건과도 연결이 된다. 아미들을 비롯한 공화주의자들이 오페라에 주목했다면 바로 이 사건 때문일 것.


포르티치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짐작한 프랑스 인근 국가에서는 이 작품을 상연 금지했는데 1830년 8월 25일 벨기에 브뤼셀의 모네극장에서 네덜란드 국왕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사흘간의 축제에서 어째서인지 이 위험한 작품을 골랐다. 네덜란드 왕 본인이 이 작품을 보고 좋아했고 몇 번인가 벨기에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하기도 했다는 이유였는데, 바로 한 달 전에 일어난 프랑스 7월 혁명에 자극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이 소요를 일으켜 취했던 상연 금지 조치를 임시적으로 풀기까지 했던 것. 대놓고 23일에는 불꽃놀이, 24일에는 등불축제, 25일에는 혁명!!이라는 포스터가 거리에 붙을 정도였다는데 왕은 불꽃놀이와 마지막 행사였던 사열만을 취소하고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는 축제 마지막 행사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25일, 오페라의 공연 중 2막의 마사니엘로와 친구 피에트로가 스페인에의 대항을 맹세하는 듀엣 조국를 향한 신성한 사랑이여 Amour sacré de la Patrie를 노래하던 중, 마사니엘로 역의 테너가 대본에도 없는 "무기를 들라 시민이여!"를 외치는 것을 신호로 관객은 거리로 뛰쳐나갔고 그것이 벨기에 혁명의 시작이 되었다. "혁명은 무대에서 거리로 옮겨갔다 (...) 4막이 끝날 때쯤 관객들은 그들 자신의 혁명극의 엔딩을 완성하기 위해 극장을 떠났다. 오페라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있을 때 혁명의 용암은 이미 브뤼셀의 거리로 흘러 넘쳐 달리고 있었다."는 묘사처럼 이 뜨거운 순간을 두고 바그너는 예술이 역사적인 사건을 일으킨 드문 예라며 감격에 차서 평하기도.


그러나 사실은 이미 공연 전날 신문에 오페라의 5막 전에 거리로 나와 합류하라는 암호를 싣기도 했으니 노래에 너무나 감격해서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애초에 왕이 친림한 행사라 군인과 경찰이 쫙 깔려있었는데 갑자기 흥분해 뛰어나간 몇백명의 시민이 우연히 감격한 거리의 시민과 만나서 혁명에 성공하는 그런 건 정말 멋지고 감격스럽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 카페씬에서 앙졸라스도 그러잖아ㅠㅠ 책에 따라서는 이 공연을 브뤼셀의 경시총감도 보고 있다가 도중에 극장 밖의 상황이 궁금해서 심부름꾼 소년을 보냈는데 어째서인지 이걸 두고 경시총감이 박스석에서 암살당했다는 루머가 튀어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민중들은 이게 혁명 신호다-하고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게 그런 상황에서 왜 총감씩이나 되면서 굳이 공연을 보러간거야... 하기는 네덜란드 왕 본인이야말로 생일날이라 좋아하는 공연 보러갔는데 혁명 일어나더니 벨기에 왕 자리에서 밀려나고 갑자기 영토가 토막날거라는 상상은 못 했겠지. 여러분 관극이 이렇게 무서운 덕질입니다. 좋아하는 공연 보겠다고 욕심내다가 나라도 잃고 왕위도 잃고 막 일상도 잃고 그럽니다.                                      

 

이미 짜여진 일정이었고 노래는 신호에 불과했다고 하더라도 문제의 듀엣은 라 마르세예즈에서 가사를 따온 제목에서 짐작이 가듯 대놓고 혁명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곡이다. 혁명기 음악에서 현악기의 섬세한 음 대신 관악기가 주를 이루는 힘찬 군악풍이 유행하면서 "아폴론이 리라를 내려놓고 붉은 모자를 쓰고는 트럼펫을 들었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성으로 이해하는 시가 아닌 감성으로 먼저 느끼는 음악이 직접적으로 혁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대에 걸맞은 노래.






      

 



Masaniello :

Mieux vaut mourir que rester misérable!

Pour un esclave est-il quelque danger?

Tombe le joug qui nous accable,

Et sous nos coups périsse l'étranger!

Me suivras-tu?


Pietro : Je m'attache à tes pas,

Je veux te suivre à la mort ...


M : A la gloire!


P : Soyons unis par le même trépas.


M : Ou couronnés par la même victoire.


M et P : 

Mieux vaut mourir que rester misérable!

Pour un esclave est-il quelque danger?

Tombe le joug qui nous accable.

Et sous nos coups périsse l'étranger!

Amour sacré de la patrie,

Rends-nous l'audace et la fierté;

A mon pays je dois la vie;

Il me devra sa liberté.


P : Songe au pouvoir dont

l'abus nous opprime, 


M: Songe à ma sœur arrachée à mes bras!


P : D'un séducteur peut-être elle est victime?


M : Ah! quel qu'il soit, je jure son trépas!


M et P : 

Mieux vaut mourir que rester misérable!

Pour un esclave est-il quelque danger?

Tombe le joug qui nous accable.

Et sous nos coups périsse l'étranger!

Amour sacré de la patrie,

Rends-nous l'audace et la fierté;

A mon pays je dois la vie;

Il me devra sa liberté


마사니엘로: 

비참함 속에 연명하느니 죽음이 낫다!

우리같은 노예가 더이상 무얼 두려워 하겠나?

우리는 멍에를 떨치고 일어나

정의로운 투쟁으로 외적을 물리치리라!

자네 나와 함께 하겠나?


피에트로: 나는 자네 걸음에 묶여있네

나는 죽음으로 자네를 따르겠네


마사니엘로: 영광으로 함께 하세!


피에트로: 함께 죽음으로써 우리는 하나 되겠지


마사니엘로: 함께 승리함으로 같은 영예를 입거나 


함께:

비참함 속에 연명하느니 죽음이 낫다!

우리같은 노예가 더이상 무얼 두려워 하겠나?

우리는 멍에를 떨치고 일어나

정의로운 투쟁으로 외적을 물리치리라!

조국을 향한 나의 신성한 사랑이여

내게 용기와 자긍심을 주소서

그대에게 내 목숨을 받았으니

자유를 되찾아 갚아 드리리


피에트로: 우리를 짓누르는 

저 압제자들을 생각해


마사니엘로: 내 품에서 떨어져나간 내 누이를 생각해주게! 


피에트로: 어쩌면 유혹에 넘어간 

희생자?


마사니엘로: 그가 누구든 죽음만이 있으리!


함께: 

비참함 속에 연명하느니 죽음이 낫다!

우리같은 노예가 더이상 무얼 두려워 하겠나?

우리는 멍에를 떨치고 일어나

정의로운 투쟁으로 외적을 물리치리라!

조국을 향한 나의 신성한 사랑이여

내게 용기와 자긍심을 주소서

그대에게 내 목숨을 받았으니

자유를 되찾아 갚아 드리리   



한글 대본이 없어서 영대본을 번역한 거라 미덥지 않은 번역임을 고백함. 음악 없이도 충분히 선동적인 이 가사가 검열 통과했다는 것도 신기하고 정말 이런 걸 부르다가 테너가 시민들이여 무기를 들자 외치면 제4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면서 뛰어나가고 싶었겠다는 생각은 든다.


7월 혁명 이후 한 달 만에 벨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샤를 10세를 끌어내리고서도 공화정을 세우는데 실패하고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데 그친 아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텐데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결말을 맞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의 혁명이라서 벨기에는 네덜란드에서 독립하는데 성공하지만 네덜란드 왕이 물러간 자리에 민중의 대표를 세워 공화정을 수립하는 대신 루이 필리프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둘째 아드님을 우리 왕으로 주실래요? 아무리 루이 필리프가 7월 혁명 당시에는 바리케이드의 왕이라는 혁명친화적인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화주의자들 눈으로 보기에는 이번에도 부르주아와 왕당파의 승리였을 뿐인데 이게 무슨 짓이냐고 경악하는 아미들이 눈에 선하지 않나. 푀이가 이번만큼은 폴란드와 그리스 문제는 제쳐두고 크게 화내주면 좋겠다. 다들 흥분해서 어째서 공화정이 세워질 이 좋은 기회를 걷어차냐 어째서 이미 독립된 국가가 된 벨기에의 운명에 다른 나라들이 관여해 공화정의 싹을 자르냐고 분노할 때 구석에서 그러고보니 나폴리도 스페인 물러가고 결국 다시 다른 나라 지배받았지 오페라대로 가네ㅋ 비꼬는 R이라거나. 


벨기에 민중의 뜻이 전부 그러했을 리는 없고 분명히 네덜란드 왕이나 프랑스 왕이나 왕은 왕이지 이러려고 혁명했냐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성공적인 혁명 이후에 결국 찾은 길이 다른 나라 왕을 모셔오자라니 안타까운 것은 사실. 루이 필리프로서는 프랑스 왕 된지 1달만에 벨기에가 절로 굴러오다니 좋아서 냉큼 손을 뻗고 싶었겠지만, 프랑스의 확장을 견제하던 다른 나라들의 개입으로 프랑스와 벨기에의 통합은 이뤄지지 못했다. 프랑스 왕 불렀으면 좋겠는데 안 된다니 그럼 공화정으로 가자고 할 법하지만 이 시기 나라 불문 권력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면서 기겁하던 게 공화정이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성공한 독립혁명이라는 위험한 선례가 된 벨기에가 공화정 체제로 가도록 둘리가 없었다. 결국 벨기에 독립정부는 나름 정통성 있는 왕족을 골라다 모셔와 입헌군주제를 택하게 되었다.    


공화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7월 혁명도 벨기에의 독립 혁명도 결과적으로 실패한 혁명, 혹은 반쪽만 성공한 혁명이겠지만 그럼에도 혁명사에서는 의의를 가진다. 벨기에는 공화정을 세우지는 못 했지만 이때 새롭게 제정된 헌법에서 의회의 권한을 키워서 과거 네덜란드 지배하에 있을 때보다는 진일보한 정치체제를 가질 수 있었으니 이런 실패, 혹은 반쪽짜리 성공이 의미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이고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차츰 바뀌어가고 더는 왕정만이 정당한 답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수 있었던 것. 이런 좌절과 변화가 이어지면서 2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드디어 사람들은 부르봉이건 오를레앙이건 발루아건 더이상 어떤 왕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고.

  

레미즈를 파면서 바리케이드 데이를 맞을 때마다 해피 바리케이드 데이라고 할지 애도의 날로 삼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아미들은 두려움에 떨지 않고 갔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잘가! 손을 흔들 수는 없는 마음이라서. 반쪽이라도 성공한 7월혁명이나 벨기에 혁명에 비해 아미들이 세운 바리케이드는 너무나 확실한 패배로만 남아 대체 무슨 의미고 무슨 죽음이었나 하다가도 이 시기 일어난 일들을 이렇게 짚어 보면 아미들의 바리케이드는 외롭게 동떨어져 어느날 갑자기 홀로 세워졌다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과 위로를 받게 된다. 아미들의 바리케이드 뒤에는 가까이는 벨기에 독립을 위해 거리로 나간 사람들, 샤를 10세를 끌어내린 7월 혁명의 주역들, 그 보다 더 멀리 가면 대혁명의 성난 민중들이 버티고 있다. 이 뜨겁고 아픈 혁명의 연결은 아미들이 바리케이드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끊어지지 않았다. 그 앞에는 2월 혁명이, 파리 코뮌이 있고, 레지스탕스와 사회운동이 있고, 지금 이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싸움을 계속 하면서 아미들의 바리케이드를 이어받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정말로 바리케이드 데이 앞에 해피를 붙일 수 있다. 


해피 바리케이드 데이!

고마워, 아베쎄의 벗들! 

앙졸라스! 콩브페르! 쿠르페락! 푀이! 즈앙! 바오렐! 졸리! 보쉬에! 그리고 그랑테르!!

세상에 비참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마찬가지로 함께 할 예쁘고 소중한 모든 사람들!!!    






+ 이 모든 변화와 전복과 소란 속에서도 법 하나만 믿고 가셨던 경감님도..새삼 대단하십...엉엉 경감님은 바보야 엉엉

아직은 안 가셨을 시간이지만 부디 천국에 들어 평안하시길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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