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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Carlo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1막

neige 2014. 7. 4.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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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Carlo] -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돈 카를로 5막과 4막의 가장 큰 차이는 1막이 퐁텐블로 숲에서 시작하는가 아니면 이걸 생략하고 바로 산 유스테 수도원에서 시작하느냐다. 퐁텐블로 숲에서 길을 잃은 엘리자베타가 카를로를 만나고 두 사람이 정략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지는 동화같은 로맨스는 희곡에는 없는 부분. 난 오페라냐 희곡이냐를 선택하라면 희곡을 택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퐁텐블로가 싫다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좋아함. 


시종일관 칙칙하고 무거운 이 오페라에 유일하게 얹어놓은 자그마한 설탕장식이라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 우선은 엘리자베타와의 이별을 카를로의 노래로 들려주는 4막에 비해서 어떻게 만나고 사랑에 빠졌으며 그럼에도 왜 헤어져 어떻게 아파했는지 직접 보여주는 5막 쪽이 감정이입이 낫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고 4막 버전에서는 드러날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엘리자베타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라는 게 두번째 이유다. 더불어 엘리자베타와 카를로의 성격과 성숙함의 차이도 비교가 되고. 





앞선 포스팅에서도 말했지만 13잘츠는 다른 이탈리아어 5막에서도 생략되는 부분들을 넣었기 때문에 막이 오르자마자 등장하는 건 사냥에 나선 엘리자베타나 숲에서 혼자 노래하는 카를로가 아니라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이다. 레미즈의 At the end of the day의 16세기 버전이랄까. 아무래도 오페라라서 레미즈만큼 밑바닥을 맨 손톱으로 긁어내는 절절함은 덜한 상대적으로 우아한 합창이지만 사실 16세기 프랑스 상황은 300년 뒤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는 게 슬픈 사실.


이런 고통의 원인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 이게 엉뚱하게도 이탈리아 지배권을 놓고 싸웠던 거. 르네상스 이후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힘을 잃어가는 이탈리아를 스페인이랑 프랑스가 서로 지배하겠다고 나섰던 건데-이탈리아 사람인 베르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이 부분을 작곡했으려나 궁금해지지만- 펠리페 당대에 시작한 전쟁도 아니고 거슬러 올라가면 60여년을 이어진 전쟁이었다.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니 백성들에게는 먼 영광인데 그 고통은 가까운 거라 전장으로 떠나 돌아올 기약 없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전쟁에서 아들을 모두 잃은 홀어머니의 슬픔도 나온다. 그런 슬픔은 아랑곳 없이 사냥을 떠나는 왕의 일행을 보던 백성들이 찾는 건 왕의 딸, 엘리자베타. 





금붙이를 건네며 스페인의 사절이 왔으니 평화조약이 체결될 거라고 이제 안심하라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엘리자베타의 모습은  클리셰 수준인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공주님의 모습이지만 소녀처럼 천진하게 백성들의 괴로움은 모른채 사냥을 하는 버전과는 다른 이미지를 여기서부터 심어주게 된다. 


반면에 카를로는 아버지 펠리페 몰래 사절단에 숨어들어서 프랑스에 왔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온 목적은 약혼녀 엘리자베타 보려고. 더해서 아빠 싫어서 나온 것도 있기는 있지만. 좋게 말해서 순수하고 낭만적인 왕자님인거고 솔직히 말해 생각없음의 싹수가 벌써부터 보인다. 스페인이 이겼으니까 별 생각 없이 기분 좋겠지하고 봐주려고 해도 그러니까 다 이긴 전쟁 협상자리에 아버지는 이렇게 장성한 아들을 사절단에 끼워주지도 않고 프랑스도 가지 말라고 했겠지... 





그와는 별개로 백성들을 위로하느라 일행을 놓치고 길을 잃은 엘리자베타와 카를로가 만나서 풋풋하게 서로를 탐색하고 엘리자베타도 소녀다운 소망, 낯선 나라로 시집가지만 그래도 상대와는 서로 사랑했으면 하는 꿈을 털어놓고 카를로는 의뭉스럽게 왕자는 당신을 사랑할거라고 확신하면서 자신의 초상화를 내미는 깜찍스러운 고백을 하는 부분은 귀엽긴 함. 카를로가 엘리자베타를 위해서 모닥불을 피우면서 군대 있을 때 이런 식으로 불피웠다 은근히 남자다움을 자랑하는 것도 귀엽게 봐주면 된다.


왜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고 있을 수 있냐하면 성으로 사람을 부르러 갔던 시종 테발도가 엘리자베타의 결혼 상대가 카를로가 아니라 그 아버지인 스페인의 왕 펠리페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때문에. 펠리페를 대신해서 온 레르마는 강화조건은 그렇지만 그럼에도 펠리페는 공주의 자유로운 의사로 결정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엘리자베타의 의향을 묻는다.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보는 카를로의 기대와는 달리 엘리자베타는 평화를 바라는 백성들의 애원에 펠리페와의 결혼을 받아들인다. 따지고 보면 여기서 엘리자베타가 안 하겠다고 안 할 수 있었던 결혼이었겠냐만은 펠리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를 줬으니까 엘리자베타의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한 욕심은 아닐 수도 있는 게 이렇게 깔리는 것. 엘리자베타가 개인적인 욕망은 분명히 있음에도 자신의 의무를 알고 거기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기서 확실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이런 엘리자베타의 모습은 이후 카를로가 자신의 욕망과 감정때문에 의무를 버리는 모습과 대비가 된다. 





이제 평화가 왔다는 기쁨의 합창 속에서 여왕의 신분으로 올려진 엘리자베타와 약혼녀를 새어머니로 맞게 된 카를로가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괴로워하고 가마에 올려진 엘리자베타가 카를로에게 손을 뻗으면서 궁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공적으로는 최고의 영광을 입는 순간이 사적으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이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데 시몬 보카네그라의 프롤로그에서도 같은 대비가 쓰였다. 참 전통적인 장치인데 베르디가 이런 거 잘 쓰는 거 보고 있으면 이러면 내 얘기 잘 따라오겠니?하고 물어보는 것 같아서 되게 친절하고 좋은 분이라는 호감이 쑥쑥 들더라고.


카를로역의 카우프만은 잘 생긴데다가-덕분에 카를로 욕하려다가 카우프만이 노래하거나 연기하는 거 보고 있으면 말을 좀 곱게 고르게 되는 효과가 있다- 천진하게 굴 때는 제법 소년답고, 엘리자베타역의 하르테로스는 첫 인상이 하우스의 커디 원장이랑 닮아서 저 분은 좋은 관리자왕비님이 되겠구나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우아한 분위기. 



이하 역사랑 희곡 등등을 동반한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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