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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2막 1장 본문

Don Carlo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2막 1장

neige 2014. 7. 2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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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Carlo] - 돈 카를로 20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1막





4막 버전에서는 1막에 해당하는 이른 새벽의 산 유스테 수도원.


수도사들의 어두운 합창에 이어서 무겁게 울리는 수도사/카를5세의 노래는 사실상 돈 카를로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부분. 그런 관계로 수도사/카를5세가 첫 부분부터 베이스로 무대를 꽉 눌러주면서 나가야 하는데 13잘츠 수도사 로버트 로이드 좋음. 가사에 되풀이되는 신의 강력한 권능과 세속의 허무한 권력의 대비는 종교의 힘 아래 짓눌려 있는 스페인의 갑갑한 분위기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오페라 전체를 보고 나서 다시 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형식으로서의 종교가 아닌 진짜 신 자신은 세속의 일에 얼마나 무력한지가 보여서 교회를 향한 냉소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카우프만의 카를로는 여전히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괴로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데 1막의 퐁텐블로숲의 달달한 분위기에 비해서 이쪽이 더 잘 어울리는 듯. 절망적인 사랑에 빠진 왕자라는 캐릭터에 더해 카우프만의 카를로가 또 다른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카를 5세의 목소리를 듣고 두려움에 떠는 부분부터다. 환영인지 유령인지 산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조부의 팔에 사로잡혀 공포로 굳어지는 카를로는 이 왕자가 이미 환영을 볼만큼 약해져있거나, 혹은 그런 자극에도 바로 무너지는 심약한 성격이라는 걸 보여준다. 카우프만의 목소리는 테너라고 해도 무겁고 어두워서 음색으로만 따지면 상남자인데 그런 목소리로 이렇게 유리멘탈인 캐릭터를 노래하니 재미있더라. 이제까지 접한 카를로 중에서는 멘탈로 따지면 제일 연약하지 않나 싶다. 목소리만큼은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미성이었던 96샤틀레 버전의 알라냐카를로는 도도하고 품위있고 자기 고집이나 성깔도 있어서 도저히 약하다고는 할 수 없어서 비교도 되는데 96샤틀레는 또 나중에...






그렇게 카를로가 두려움에 떨면서 무너진 상태에서 로드리고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일어설 수 있는 것도 카를로와 로드리고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즐겁다. 고통스러운 나를 위해 하느님이 널 보내셨구나 위안의 천사여-하고 로드리고를 반기는 가사와도 부합하는데 이런 카를로를 마주하고 웃는 로드리고의 표정이 앞으로 이어질 거대한 케미의 시작.


로드리고와 카를로의 케미가 단순히 특정 취향의 사람을 흡족하게 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극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관계, 엘리자베타를 향한 카를로의 가망없는 사랑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뼈대라서 어떤 로드리고와 어떤 카를로가 어떤 사이로 그려지느냐가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드리고의 캐릭터도 카를로의 캐릭터도 둘의 케미도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는 최고. 이게 처음 본 돈 카를로 아니냐 어떻게 최고라는 거냐고 물으신다면, 로드리고의 죽음 영상을 본 게 12월, 그 후로 DVD가 나오기까지 6개월이 더 걸렸다. 2월에 나온다더니 4월로 밀리고 결국 6월로 밀리더라고=_= 작년 8월에 한 공연 영상을 올해 6월에야 내주다니ㅠㅠ 출시 기다리는 동안 뭐하겠나. 나와 있는 돈 카를로 영상이며 음반들을 열심히 찾아봤지;; 


아무튼 13잘츠로 돌아와서 수도원 장면 내내 로드리고와 카를로는 무대 위에 갑자기 등장한 오랜 친구라는 설정의 후작과 왕자가 아니라 이미 다른 누구로 대체할 수 없는 두터운 관계를 쌓아온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이쪽에서 목격하게 되는 인상을 준다. 


플랑드르에서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는데 관심은 요만큼도 안 보이고 새엄마를 사랑한단 말이야, 이런 불행한 사랑을 하는 불쌍한 나ㅠㅠ하고 고백을 하고는 충격 받은 친구에게 로드리고 너도 이런 내가 싫구나 이런 불쌍한 나222 징징거리는 카를로놈을 보면 누가 네 외로운 영혼에 관심이 있단 말이냐 이게 부자집 도련님들의 장난 같냐 오페라처럼 살거냐 화를 내고 등짝을 때려줄만도 하다. 


하지만 햄슨로드리고는 충격을 받았다가도 카를로가 우는 소리에 달려와 당신이 괴로우면 세상 모든 게 내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나의 왕자님!하고 카를로를 안아준다. 이게 일단 카를로 정신을 수습해서 플랑드르로 관심을 돌리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같아서 카를로의 충실한 친구라는 설명이 붙는 로드리고로서는 정말이지 이렇게 간도 쓸개도 다 저당잡힌 로드리고가 없겠다 싶을만큼 흐뭇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플랑드르는? 응? 플랑드르는??


햄슨의 로드리고는 본인이 연배가 있다보니까 엘리자베타를 능란하게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고 펠리페도 정색하는 걸로 정신차리게 할만큼 노련한데 카를로에게만큼은 무조건적으로 상냥하고 다정하고 약하다. 이 로드리고에게 카를로는 아킬레스건 정도가 아니라 그냥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심장임. 숨만 크게 쉬어도 아플까 티끌만 굴러와도 긁힐까 이렇게 애지중지할 수가 없다. 


원작의 카를로는 생모를 태어나면서 잃고, 살아있는 계모를 여자로 사랑하는 입장이라 나는 어머니의 애정을 모르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비관하는데 햄슨로드리고 보고 있으면 엄마 따로 필요없네 싶다. 카를로놈이 징징거리는 걸 마음을 다해 얼러주고 위로하고, 플랑드르로 가라고 설득하는 말에 카를로가 성질을 내는데도 참고 다시 붙들고 설득하고, 그래서 카를로가 마지못해 가겠다고 하자 그것도 승락이라고 이래야 내 왕자님이지 하는 눈으로 예뻐하면서 웃는데...후작, 걔는 진짜 아니에요. 눈에 붙은 그 애정 좀 떼어내고 냉정하게 봐봐. 걔가 어딜봐서 왕의 재목이고 스페인과 플랑드르의 구원자인지. 물론 잘생겼지만 통치를 얼굴로 하는 건 아니잖아. 결국 절망적인 사랑에 빠진 건 카를로 하나가 아니다. 플랑드르는 틀렸어...( mm


로드리고도 앙졸라스처럼 그냥 파트리아나 사랑하면 좋았을 것을. 로드리고는 자유 좋아하니까 리베르타만 사랑하지 그랬어. 플랑드르 독립전쟁때 리베르타는 플랑드르의 딸이라고 할 정도였단 말야, 혁명의 탄생에서도 플랑드르 독립전쟁의 의의는 자유의 탄생이라고 했고, 리베르타도 파트리아 만큼이나 피비린내 좋아하는 언니지만 그래도 카를로놈 따위보다 훨씬 좋은 상대인데. 그랑테르가 술의 힘을 빌려서 앙졸라스를 잡고 파트리아야 나야 물어볼라치면 앙졸라스는 아예 질문 자체를 못 꺼내게 심연의 질책을 담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볼텐데 햄슨로드리고는 카를로가 리베르타야 나야 물어보면 3초간 고민하다가 카를로가 그 새를 못 참고 울망울망하는 거 보고 일단 달래고 볼것 같다.


하지만 카를로가 수도원 문이 열리는 종소리를 듣고 엘리자베타가 온다는 생각만으로도 손도 못 가누고 부들부들  떠는  걸 보고 있으면 어찌나 안스러운지 나같아도 못 버릴 것 같으니 로드리고를 이성적이지 못하다 비난할 수가 없다. 어쩔 줄 몰라하는 카를로를 로드리고가 다독이는 장면이 또 연출이 노린 회심의 장면. 





바로 이 구도, 혼란스러워 하는 카를로를 로드리고가 다잡아주는 이 맹세의 상황이 이후에 두 번 더 되풀이 된다. 로드리고가 함께 할 건지를 확인하듯이 불안한 눈으로 돌아보는 카를로와 그런 카를로에게 나 여기 있다고 미소 지어주고 어깨를 잡아주는 로드리고의 애틋한 구도는 남은 두 번에 비하면 그래도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 게다가 카를로를 안심시키는 로드리고의 웃음은 이 칙칙하고 답답한 오페라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기도 하고. 


이렇게 로드리고가 무너지기 직전인 카를로를 잡고 신에게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불씨를 심어달라고 기도하는 부분이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듀엣인 Dio che nell'alma infondere. 이 이중창을 우정의 이중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따지고 보면 이건 우정이 아니다. 


스페인은 가장 왕성하게 종교재판이 열렸던 곳이다. 거기에 스페인 왕인 아버지 펠리페는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했는데 그 왕자인 친구를 잡고 플랑드르의 신교도들에게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줘야한다고 사약 먹이고 있는 이 행동의 어디가 우정이란 말인가. 더구나 플랑드르 신교도들이 평화시위한 것도 아니고 성상 때려부수고 세금 못 낸다고 뒤집어 엎어놨는데. 그나마 친구가 멀쩡하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애 고민을 들어주는 척 하다가 그러니까 플랑드르로 가야한다고 부추기는 이 행동 어디가 우정인가. 실러도 세상에 어느 친구가 이딴 짓을 하겠어요? 우정 아님! 하고 친절하게 밝히고 있다.


로드리고에게 카를로는 단순한 친구이기 이전에 왕의 아들, 로드리고의 이상을 실현해줄 도구라서 이런 무리한 일을 밀어붙였다는 것이 실러의 해명인데 그런 이유라면 이렇게 카를로를 애지중지하는 햄슨로드리고의 해석이 틀린 거 아니냐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실러가 밝히는 로드리고의 마음은 그렇게 차갑고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의 사랑의 대상은 열광의 완벽한 조명을 받으며 그에게 나타납니다. 그 모습은 연인의 모습처럼 그의 영혼 앞에 장엄하고 순화되어 나타나죠. 인류의 행복이라는 이상을 현실로 만들 사람이 카를로스이기에 그는 그 이상을 그에게 넘겨주고, 그렇게 해서 이상과 친구가 하나의 감정 안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합쳐지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오로지 카를로스에게서만 뜨겁게 사랑하는 인류를 보는 것이죠. 그의 친구는 하나로 합쳐진 전체에 대한 그의 모든 표상이 모이는 발화지점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의 영혼의 온갖 열광과 온갖 힘을 다해 포괄하는 하나의 대상 안에서만 그에게 작용하는 것이죠.


제 마음을 한 사람에게만 바쳤으며, 그 마음은 온 세상을 품었습니다! 

카를로스의 영혼에다가 저는 수백만 명을 위한 천국을 건설한 겁니다.


여기에는 그러니까 전체를 향한 사랑에 밀리지 않고도  존재를 향한 사랑이 있고, 우정의 조심스러운 배려가 부당함 없이 정열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지요. 여기서 보편적인 박애, 모든 것을 포함하는 박애 사상은 단 한줄기 불꽃 속에 모이는 것입니다.


-<돈 카를로스>에 부치는 편지 중 넷째 편지





중간에 인용된 두 줄은 희곡에서의 로드리고의 고백, 굵은 글씨는 실러 본인의 강조. 그러니 로드리고에게 카를로=이상=인류, 로드리고가 자신의 이상과 인류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만큼 카를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드러나는 게 맞다. 물론 어쩌다 카를로 같은 거 한테 마음을 바쳤다니하는 의문이 들지만 실러가 우주적인 사랑의 신적인 요소를 온건하게 인간에게 적용했다는 이유로 로드리고 까지 말라고 했으니까 일단 여기서는 원작자의 의사를 존중해서 까지말고 넘어가자.


카를로에게 가진 로드리고의 마음이 단순히 뜻을 함께 하자는 우정이 아닌 관계로 희곡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부분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카를로가 로드리고에게 자신을 왕자가 아닌 친구로 대해달라고 하면서 둘이 말을 놓기로 하는 부분이 있고-그러니 엄밀하게 가자면 오페라에서도 2막 1장 이후의 두 사람은 왕자와 후작이 아닌 친구로서 서로 말을 놓는게 맞다. 대본상으로도 이후에 로드리고는 카를로를 왕자님으로 칭하지 않고 일관되게 카를로라고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 앞에 로드리고와 카를로의 맹세가 있기는 한데 그건 이런 낭만적인 성격의 우정의 맹세는 아니었다. 우정과 애정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하는 카를로에게 로드리고는 미래의 왕이 인류를 위해 지켜야 할 약속을 바란다. 대혁명 이전에 이 희곡을 쓴 실러가 말하는 왕정과 자유주의의 조화라고 해야하나. 군주의 신하가 될 줄 모르는 자유주의자임에도 카를로에게 전부를 헌신한 로드리고라는 인물이 얼마나 이상적인 인물인지가 드러나서 한 줄 한 줄이 전부 흥미롭지만 솔직히 카를로가 왕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그 맹세를 지켰을것 같지는 않다.


베르디는 희곡의 철학적인 대사 대신 아름다운 이중창을 만들어서 넣었고 그 덕에 왕정 안에서 어떻게 자유라는 이념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뜨거운 우정에 감동할 수 있으니까 오페라에는 이쪽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더해서 로드리고가 카를로만 혼자 죽을 길로 이끄는게 아니라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한다는 점에서 비정한 조종가라는 혐의도 벗을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삼덕-촉빠인 눈으로는 역시 이런 맹세를 한 사람들치고 뒤끝이 좋은 사람들이 없는 거지 싶지만 어쨌든 바리톤과 테너의 화음은 아름답고, 가사도 안스럽지만 멋지고, 로드리고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하고 확 끌어올리는 부분도 좋고, 엘리자베타를 잃었다는 걸 눈으로 새삼 확인하고 무너지려는 카를로에게 로드리고가 맹세를 되풀이하면 카를로가 따라서 외치는 형식인것도 좋다.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불꽃을 심어서 자유를 위해 살게 해달라는 가사 자체는 희곡에서 로드리고가 마지막으로 엘리자베타를 만나서 카를로를 부탁할 때의 말과 로드리고의 죽음 이후 엘리자베타를 대하는 카를로의 말에 실마리가 들어가 있다. 로드리고는 카를로의 불행한 사랑을 말리는 대신 그 열정을 불씨 삼아서 인류를 향한 불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로드리고가 죽으면서 카를로의 마음에서 그제야 그 열정의 교체가 일어나기는 했는데 엘리자베타 입장에서 보면 스페인 남자들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이냐고 화가 날만도 하지...;


로드리고와 카를로에 따라서 이 사약을 우아하게 들이밀고 우아하게 받아먹기도 하고, 우는 애 붙들고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 약을 왈칵왈칵 부어넣기도 하고, 운동부 코치마냥 잘한다 잘먹는다 부추기면서 먹이기도 하고, 열심히 약 들이밀어봐도 끝끝내 못 먹이기도 해서 해석별로 보는 재미가 있다.


13잘츠에서는 보약 먹이듯 이 약 한 번 먹어봐 착하지착하지 얼러주면서 먹이는데 애정이 가득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로드리고를 보고 있으면 정말 사약 아니고 보약이라는 착각이 든다. 이렇게 다정하게 사약을 주는 로드리고의 애정이 헛되지 않게 또 홀딱 넘어와서 열정적으로 맹세를 외치는 카를로를 보면 로드리고가 왜 카를로한테 전부를 거는지 이해할 것도 같고. 거기다가 이 연약한 카를로가 어찌나 로드리고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의지해 있는지 얘는 이 약이라도 안 먹이면 낼모레 쓰러질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서 그래도 실연의 상처로 죽게 두는 것보다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대업을 위해 싸우라고 동기부여 해주는 게 훨씬 낫지 그럼그럼하고 로드리고의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가혹한 부추김이 당위성까지 가진다. 더해서 맹세를 따라 하는 카를로를 기특하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로드리고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아마 내가 안 보는 데서는 카를로가 멀쩡하고 왕자다워서 로드리고가 거기 반해서 얘를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왕으로 기대하고 있구나 하는 믿음도 마구 생김. 


그런 믿음이 드는데도 보는 입장에서 가슴이 벅차기보다는 짠해지는 건 역시 결말을 알기 때문인데 무대 덕분에 그런 안스러움이 더 커진다. 13잘츠 무대를 두고 들인 돈이 얼만데 무대가 이렇게 썰렁하냐고 비판하는 소리도 있었는데 간결한 무대 덕분에 새벽의 청회색을 주 색조로 한 차갑고 텅 빈 수도원 한쪽 구석에서 로드리고에게 기대어 서 있는 카를로와 그런 카를로를 붙들고 함께 죽고 함께 살자는 맹세를 하는 로드리고가 한층 애잔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 


카우프만은 인터뷰에서 카를로에게 로드리고는 카를로의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희곡에서도 카를로는 아버지의 왕국에서 로드리고를 제외하면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로 나오는데 그런 관계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13잘츠 무대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보다보니 내 취향이 무대는 간소하고 사람이 두드러지는 쪽이더라고;


그럼 이쯤에서 실제 13잘츠에서 두 사람의 이중창을 보자.







메디치티비의 13잘츠 돈 카를로 홍보영상인데 이걸 보면 메디치티비가 장사를 얼마나 못 하는지가 보임.



로드리고가 기껏 마음 잡게 만들어서 함께 부른 맹세를 일순간에 날려버릴 만큼 괴롭게 그녀를 잃었네 그녀는 아버지의 사람-되풀이하는 카를로의 마음 아픈 노래가 안 들어갔다는 게 일단 아쉽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13잘츠의 Dio che nell'alma infondere가 완성되는 순간이자 최고의 순간은 막이 내리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타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 자신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걸 눈으로 보고 절감해서 괴로워하는 카를로가 로드리고를 따라 피를 토하는 것처럼 절절하게 엘리자베타의 이름 대신 자유를 외치고나서 확신/위로/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로드리고를 올려다보면 로드리고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카를로가 그제야 그 품에 와락 뛰어드는 순간. 그런데 거기까지 안 가고 중간에 자르다니. 거기까지 가려면 너무 길긴 했겠지;


그러나 메디치티비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소니는 아예 DVD에서 2막1장을 다른 날짜의 공연 부분을 사용했다ㅠㅠㅠㅠ 내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DVD를 받아들고 퐁텐블로 스킵하고 산 유스테부터 보다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ㅠㅠ 이게 내 기다림의 대가란 말이냐 소니여ㅠㅠ 물론 편집이야 소니가 한 건 아니겠지만 누가 했든지 왜 그랬어요 왜ㅠㅠㅠㅠㅠ





왜 이걸 안 쓰고ㅠㅠ왜ㅠㅠㅠㅠ

그렇다고 DVD 2막 1장의 카를로 로드리고 케미가 영 아니라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당연하지만 배우가 같은 배우고 연출이 같은 연출인데 그쪽도 좋음. 그것만 놓고서도 여기 카를로 로드리고 케미가 단연 최고라고 말 할 수 있고 DVD의 2막1장은 100점 만점에 총점 95점은 줄 수 있다. 문제는 스트리밍 쪽이 100점 만점에 120점짜리였다는 거지ㅠㅠ 진짜 시선이며 터치며 타이밍이며 완벽했단 말이야ㅠㅠ 왜 이걸 바꾼거지? 시각말고 청각적인 면에서 뭔가 더 나아서 그랬나? 햄슨 노래는 어차피 거기서 거긴데??


청각적인 부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카우프만의 목소리가 테너 중에서는 무겁고 햄슨의 목소리는 바리톤 중에서는 하이 바리톤이라서 이중창의 바리톤과 테너 대비 효과가 아쉽다는 의견도 있으나 그것도 그만큼 가까운 카를로- 로드리고를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우겨본다. 내 블로그니까 하는 소리다밖에서 이런 말하면 오페라 팬들한테 야단맞음. 아쉽다는 건 많이 순화한 표현이다ㅋ


하지만 베르디팬도 아니고 오페라덕도 아닌 입장에서 보기에 이렇게 목숨 건 사이로구나 설득력 있게 바로 와닿으니 좋지 뭔가. 양웹에서도 햄슨은 절대로 '베르디 바리톤'이었던 적이 없고 장차 그렇게 될 가망도 없지만ㅋ 13잘츠에서의 로드리고는 단연 최고였다는 평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카푸칠리가 최고지만 캐릭터로서는 이 로드리고에게 당할 수 없다고 우는 사람까지 나오는 상황이니까 어차피 음반 아닌 영상이라는 매체에서는 선입견으로 평가절하 될 로드리고는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실드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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