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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를로스 번역본 본문

Don Carlo

돈 카를로스 번역본

neige 2016. 3. 9. 01:59







국내에 현재 기준으로 나와있는 번역은 세 종류다.왼쪽부터 문학과 지성사, 문학동네, 지식을 만드는 지식.

현재 구입한 것은 문지와 문동에서 낸 2종. 지만지는 아직 보류.


13잘츠 돈 카를로 리뷰에 인용한 건 4막 2장의 펠리페의 마지막 독백, '내겐 아직 하룻밤이 남았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학동네.

출간순서는 문지-지만지-문동순이고 먼저 읽은 것은 문지판인데 당시에는 문동판이 나오기 전이었고 지만지는 어째서인지 구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검색해서 나오기는 했을텐데 천 줄 요약판인 줄 알고 아예 고려대상에서 제외시켰던 것 같은데 돈 카를로스는 고전천줄 시리즈가 아니라 희곡선이라서 완역된 것 맞음.


문지판과 문동판의 차이는 문지판은 산문체로 되어있는데 반해 문동판은 원서대로 운문체로 되어있다는 것. 실러가 운문체로 쓴 것에 의미를 부여했으니 원작자의 의도를 살린 것은 문동판인데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까놓고 덕질하려고 잡은 입장에서 잘 읽히는 건 문지판.


문지판은 문동판보다 좀더 읽기 부드럽고 앞뒤 설명이 가능하도록 의역되어 있는 느낌이다. 희곡이라서 선뜻 내키지 않는 사람이라도 문지판은 읽으면서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재미있다고 할 만하다. 옛스러운 말투도 궁중 배경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어울리고. 내가 맨 처음 접한 돈 카를로스가 문지판이라서 아마도 이쪽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문동판은 자체만 놓고보면 응? 뭐라는거지? 싶은 부분도 있긴 있다.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실러가 원래 그렇게 쓴 것 같으나 원서를 못 읽으니까; 나중에 영역판이라도 봐야하나 싶은데 국역판이 세 종류나 있는데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아무래도 어차피 독일 가곡 파야할 것 같은데 독일어도 배워볼까 배우는 김에 원서로 읽어볼까 신포도로 매달아놓고 있는 중...하지만 아마 난 이 포도를 먹지 않을거야 


여기에 문지판은 오페라의 원작이 된 다른 희곡 오를레앙의 처녀도 함께 실려있다는 것도 장점. 


그렇다고 문지판을 강력추천하기에는 걸리는 게 있다. 먼저 문지판 카를로스는 교정을 어떻게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작중에 낫다라고 써야할 부분이 낳다라고 되어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출판사도 아니고 문지가, 다른 맞춤법도 아니고 낫다와 낳다라니. 순간적으로 내가 모르는 새 맞춤법이 개정됐나 다시 찾아보기까지 했다고ㅠㅠ 작중인물이 스페인 사람들이라 한국어에 서툴러서 그렇다는 드립을 치면서 웃어넘기기에는 이게 한 번이 아니라서ㅠㅠ


그리고 오역이 몇 군데 있다. 하나는 사소하고 하나는 좀 중대한 건데 이걸 알고 나니 이 모든 의역이 실러의 의도인가 다른 오역은 없는가 싶은 의심이 들어서. 사소한 건 펠리페가 고해신부인 도밍고에게서 엘리자베타의 딸인 클라라가 자기 딸이 아니라 카를로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암시를 듣고 알바 공작을 부르는 부분에서, 문지판은 톨레도에서의 일이군!-이라고 번역했는데 톨레도는 알바 공작의 성姓이다. 작위명은 알바의 공작, 이름은 Fernando Álvarez de Toledo. 그러니까 이 부분은 문동판대로 톨레도!-라고 부르는 번역이 맞을듯. 영국에서 올린 연극에서도 이 부분은 알바 공작을 부르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건 사소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가 좀 큰 거라. 로드리고가 엘리자베타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카를로스를 사랑해달라고 부탁하고 떠나는 이별 장면에서 문지판의 엘리자베타는 이제 나는 남자라는 존재가 싫어졌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게 과한 의역이라고. 자료 찾다보니 여기에서 지적을 했는데 원래는 이제 나는 어떤 남자도 (로드리고 당신보다) 높게 두지 않겠습니다-가 맞단다. 문동판에서는 난 이제 어떤 남자도 높이 여기지 않아요-로 번역되었다. 엘리자베타의 성격을 봐도 그냥 너네 다 진절머리난다는 문지판보다는 문동판이 맞을듯. 


정리하자면 문지판은 맞춤법 오기와 오역의 문제가 있지만 읽기에는 문동판보다 재미있음.  


문동판은 그렇다면 운문체로 번역된 것만이 장점이냐 하면 절대 아니다. 문동판은 사실 돈 카를로 덕질하려면 꼭 사서 보라고 권하고 싶은데 그건 희곡 뒤에 실러 본인이 돈 카를로스에 관해 썼던 글들을 모아서 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진짜 엄청 재미있음. 원작자가 자기캐 해석해주는데 덕질하려면 당연히 이건 한줄한줄 읽고 씹고 핥아야 하는 거 아니겠나. 번역해주신 분은 그러라고 번역해주신 게 아니겠지만ㅠㅠ 이런 불순한 의도로 거장의 문학을 대해서 죄송합니다ㅠㅠ 나중에 지옥가서 실러한테 원작 모서리로 맞을게요. 물론 나관중하고 위고옹한테 먼저 맞아야겠지만;  


실러의 최애캐가 로드리고라서 실러의 해설도 로드리고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로드리고가 카를로에게 품은 마음은 우정으로 보이겠지만 우정이 아니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우정이 아닌데 왜 로드리고는 카를로를 위해 희생했는지, 로드리고-카를로의 관계가 어떤 형태였는지, 로드리고는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그래서 펠리페한테 흔들리기는 한 건지 등등 오페라를 보면서는 물론이고 희곡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들에 대해서 꼼꼼하게 짚어서 이야기해주고 있어서 엄청 좋다. 특히 로드리고가 펠리페와의 독대 내용과 그 결과 얻은 총애를 솔직하게 카를로에게 털어놓지 못한 이유에 대한 해설이 정말 좋아서 세상에나 역시 의도하지 않고 쓰는 이런 관계가 최고야ㅠㅠㅠㅠ 조금도 입맛 당기지 않는 코드를 보란듯이 차려놓고 너네 이런 거 좋아하지? 낚으려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고전의 이런 미덕을 본받아야 한다니까. 


로드리고의 독단에 대해서도 개혁의 뜻을 품은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과오와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로베스피에르 생각이 절로 나서 좋아서 책을 잡고 굴렀음. 원작은 대혁명 2년 전에 발표됐는데 실러의 해설은 언제 나온건지는 모르겠지만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이전에 이런 해석을 내놓은 거라면 진짜 작가의 통찰력에 큰절을 올리고 싶을 정도ㅠㅠ 


요약하자면 문동판은 희곡 자체는 운문체라 읽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원작에 충실한 번역을 했고 해설때문에라도 살 가치가 있음. 

두 번역을 짤막하게 비교해보면 이렇다. 







    그래서 그대는 그 숭고한 이상을 내 나라의 국민들 사이에 실현시키고 싶어 하는 것인가?


후작    폐하! 폐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어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통치하는 힘을 쏟아주십시오. 그 힘은 유감스럽게도 너무도 오랫동안 오로지 폐하의 위대함을 더욱 키우는 데에만 사용되어 왔습니다. 잃어버린 인간의 고귀함을 다시 회복시켜주십시오, 또다시 백성은 본래대로 왕권의 목적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동포의 평등에 보탬이 되는 권리 이외에는 어떠한 의무도 백성을 속박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인간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스스로의 가치에 눈뜨고 자유의 고귀하고 자랑스러운 덕이 번성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폐하께서 당신의 왕국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왕국으로 만드셨을때, 바로 그때에 세계를 따르게 하는 것이 폐하의 의무가 될 것 입니다.


    (오랜 침묵 끝에)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다. 과연 그대의 머리는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세상을 그리고 있는 것 같구나. 나 역시 특별히 다른 잣대로 그대를 재볼 생각은 없다. 그대가 속내를 털어내 보인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만큼 열성이 가득한 생각을 오늘까지 남에게는 밝히지 않았다는 신중함을 감안하여 그리고 그 겸손한 사려 깊음을 감안하여 그것을 알았다는 사실도 그리고 알게 된 경위도 나는 잊어버린 것으로 하겠다. 젊은이여! 자아, 일어서라. 하지만 성급한 젊은이의 말은 국왕으로서가 아니라 노인으로서도 승복할 수가 없다. 승복하기 싫어서 승복하지 않는 것이다. 품성이 착한 자의 머릿속에서는 비록 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약간의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종교재판은 조심하라. 최악의 사태를 초래해서는 안 되니까. 


후작    그것이 진심이십니까? 이렇게 저를?


    (후작에게 반해서) 이런 사나이는 처음이야. 아니지, 아니야, 후작, 그대가 좀 지나친 것 같아! 난 네로는 되고싶지 않아. 그런 인간은 되고 싶지 않다고. 적어도 그대를 마주하고는 그런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아. 게다가 인간의 행복의 씨를 모조리 없애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네. 그대는, 그대만은, 내 앞에 남아서 언제까지고 인간으로 있어주게.













       그렇다면 그대는 그런 고귀한 모범에 따라

내 나라에서 죽어야 할 존재들 사이에서

그것을 모방하려는 것이오?

     

후작                                            마마,

마마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누가 하겠습니까?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통치자의 힘을 내주십시오.

통치자의 힘은 이미 오랫동안 옥좌의 위대함만

키웠으니, 마마께서는 인류의 잃어버린

고귀함을 다시 세우십시오. 옛날에

그랬듯이 시민을 다시 왕권의 목적으로

만들어주십시오. 대등하게 귀한 형제의

권리 말고는 어떤 의무로도 시민을 속박하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을 되돌려받은 인간이 깨어나

자기 가치의 감동을 느끼면-자유의 숭고함,

당당한 미덕들이 번창하면-

마마께서 이 왕국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만들고 나면-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마마의 의무가 되지요.


        (한참 동안 침묵한 다음)

짐은 그대가 마지막까지 말을 하도록 허용했소. 그

머리에선 세상의 모습이 보통의 머리에서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걸 알겠소. 나 또한 그대를

다른 사람의 척도에 따라 판단하지 않을 셈이오.

그대가 가장 깊은 속을 털어놓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 했지. 그 말을 믿소, 그걸 아니까.

이런 절제 덕분에 그런 불꽃에 싸인 의견

지니고도 오늘날까지 침묵할 수

있었던 게요. 이런 겸손한

영리함 덕분에, 젊은이여,

나는 그것을 들었다는 사실과, 또한 그것을

듣게 된 상황을 잊을 셈이오. 일어서시오.

지나치게 서두른 젊은이를 늙은이로서는 

반박하겠지만, 왕으로서는 반박하지 않을 셈이오.

내가 원하기에 그렇게 하려는 게요.

선량한 천성에서는 독마저도 고귀해져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겠소. 하지만

짐의 종교재판 당국을 피하시오. 거기 걸린다면

나로서도 유감이오.


후작                            정말인가요? 그래야 하나요?


        (그의 모습에 당황하며)                            나는

이런 인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아니!

아니오, 후작! 그대는 내게 너무 많은 말을 했지. 나는

네로가 될 생각이 아니오. 난 그걸 원하는 게 아니지.

그대의 말과는 달리 안 그렇소. 내 통치 아래서

모든 행복이 시든 것은 아니오.

그대 자신도, 내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으니.


   





위가 문학과 지성사, 아래가 문학동네. 

눈으로 보면 판의 운문번역이 확실하게 보이는데 이게 책으로 읽을 때는 좀 어색했는데 오페라랑 같이 보면 리브레토랑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이 잘 보여서 좋음. 판은 의역이 더해지면서 해석 자체가 문동판과 차이가 나는 것도 있는데 대신 감정선이 더 팍팍 드러날 때가 많아서 좋음. 원문은 문동판처럼 내가 널 여기서 종교재판에 안 넘기고 잘 듣고 곱게 보내주는 걸로 나한테 희망이 보이지 않니?였을 것 같은데 내 앞에서 너만은 언제까지고 인간으로 있어달라는 뜨거운 고백이 너무 좋은거ㅋㅋ 4막 2장 펠리페의 그 절절한 대사만큼은 문지판을 인용한 것도 그래서다.   


현재로서의 권장사항은 둘다 사세요. 오역을 감안하고라도 문지판의 문장은 베르디 느낌까지 나서 좋고 문동판의 간결한 원문이 무슨 의미인지 참고하는데에도 좋고 문동판은 번역은 원작에 충실하고 해설은 정말 추천이니까. 


지만지판은 어떻게 해야하나; "결국, 한 여인을 놓고 경쟁하던 부자가, 한 사람을 벗으로 삼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출판사 서평이 책의 핵심을 짚고 있어서 번역 비교용으로라도 살까 고민중인데 역자 해설의 로드리고 해석이 좀... 로드리고가 남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는 성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계획적으로 권력을 탐하면서 왕과 왕자를 홀리려던 옴므파탈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지는지라서. 카를로가 망한거 자기탓이라니까 펠리페가 망한 것도 그렇고ㅠ 그렇다고 두 권만 보기에는 로드리고의 마지막 대사 같은 게 두 번역판이 완전히 달라서 어느쪽이 맞으려나 싶은데 독일어를 배우는 것보다는 이쪽이 비교하는데 빠를거라 아마도 곧 사게 될듯. 아니면 영역판을 사거나;


-라고 2014년 4월;에 적어놓고 아직도 안 사고 있지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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