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

여기 이 가증스러운 귀족을 보자 본문

Don Carlo/TH

여기 이 가증스러운 귀족을 보자

neige 2015. 3. 13. 00:56


당연한 이야기지만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난데 없이 터지지 않는다.

수많은 갈등과 불만이 끓어오르고 새로운 사상이 거기서 태어나 다시 질문을 던지고 그 응답으로 눈이 뜨이고 갈등이 더욱 커지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렇게 모인 에너지에 불을 당기는 것은 추상적인 사상보다는 특정한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착한 농민의 딸을 농락하고 입막음 하느라 그 일가족을 죽이는 귀족, 어린 아이를 마차로 치고 오히려 말이 놀랐다며 화를 내는 귀족. 노름과 사치에 빠져서 빚더미에 올라앉아서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는 왕비, 내 아이 입에 들어갈 우유를 빼앗아 목욕하는 왕비. 


오페라에 등장하는 지배계급의 이미지도 이런 부정적인 모습이 의외로 많은데- 폭압적인 호색한이라는 전통에 충실한 나쁜 왕부터 점잖아 보이지만 이기적인 신흥 부르주아까지- 그 중에서도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정서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역할이 피가로의 결혼의 알마비바 백작이다. 프리퀄인 세비야의 이발사에서는 사랑을 위해 변장도 마다않는 귀족으로 그려지던 백작이 후속작에 와서는 부인을 두고서도 하녀를 탐하고, 거부하는 하녀와 연적이 된 하인을 계급으로 찍어누르려 드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것. 거기다 본인은 아내를 배반하고 하녀를 노리는데 한 점 부끄러움 없으면서 아내의 바람은 또 의심하고 화를 내는 전형적인 최악의 바람피는 남편이라는 특성까지 놓고보면 아니 이럴거면 뭐하려고 전작에서 그 난리를 쳐가면서 결혼을 했나하는 의문과 동시에 하긴 그 소동을 벌이고 요란스럽게 결혼해도 오래오래 행복하게는 힘든거지 라울이랑 크리스틴도 그렇고...하는 깨달음을 준다. 물론 알마비바 백작이 아무리 부정적인 캐릭터라고는 해도 아무도 안 죽고 끝나는 해피엔딩이니까 희극적인 요소도 들어가 있어서 앞에 열거한 예처럼 즉각적인 분노를 유발하지는 않고 돌려 까는 맛이 있음.  


장르의 약속 덕분에 알마비바 백작은 세비야의 이발사에서는 사랑의 주인공이니 테너가,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주인공을 방해하는 악역이니 바리톤이 맡게 되는데 코지 판 투테의 굴리엘모와 더불어 많은 리릭 바리톤들의 커리어의 시작점이 되는 역할이기도 하다.그리고 여기서는 피가로하다가 저기 가면 알마비바 백작이 되어서 피가로 방해하고 있는 장르개그 배우개그가 가능해지는 역할이기도ㅋ   

    

예쁘고 행복하게 잘 사귀고 있는 하녀 수잔나와 피가로를 갈라놓을 궁리를 하면서 감히 내가 눈독 들인 여자를 하인놈이 넘보다니-적반하장으로 나가는 알마비바 백작의 성질머리가 드러나는 부분을 보자. 화질이 척 보기에도 안 좋고 음질도 안 좋지만 볼만한 가치가 있음. 1985년 리옹 국립오페라 영상. 햄슨은 이때 서른 살, 진짜 어릴때다. 물론 어리다는 거지 특별히 더 예쁘지는 않으셨고 목소리만 좀 많이 예쁨. 












Hai già vinta la causa! Cosa sento!

In qual laccio io cadea? Perfidi! Io voglio...

Di tal modo punirvi... A piacer mio

La sentenza sarà... Ma s'ei pagasse

La vecchia pretendente?

Pagarla! In qual maniera! E poi v'é Antonio,

Che a un incognito Figaro ricusa

Di dare una nipote in matrimonio.

Coltivando l'orgoglio

Di questo mentecatto...

Tutto giova a un raggiro... 

Il colpo é fatto.



Vedrò mentre io sospiro,

Felice un servo mio!

E un ben ch'invan desio,

Ei posseder dovrà?

Vedrò per man d'amore

Unita a un vile oggetto

Chi in me destò un affetto

Che per me poi non ha?

Ah no, lasciarti in pace,

Non vo' questo contento,

Tu non nascesti, audace,

Per dare a me tormento,

E forse ancor per ridere

Di mia infelicità.

Già la speranza sola

Delle vendette mie

Quest'anima consola,

E giubilar mi fa.


벌써 이긴 셈이다. 내가 그녀에게 사랑의 말을 듣다니!

올가미에 걸렸나? 배반자! 

너희들을 똑같이 벌 주고 싶구나! 판결하는 것은 

나의 멋대로지... 그런데 그가 옛날의 빚을

갚으려고 한다면?

그녀에게 돈을 갚으려 한다면? 어떻게 갚아? 그래도 아무 것도 모르는 

안토니오(수잔나의 삼촌)가 수잔나를 주길 원하지 않으니 됐어.

내가 조금만 재치를 발휘하면

모든 게 나의 뜻대로 되겠지.

러면 치명타야.




나 한숨 쉬는 동안

그들 행복하겠지?

나의 꿈은 허사가 되고 

그 놈이 그녀를 

소유하게 될까?

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 여인이

나를 사랑하진 않지만

그런 노예 녀석이랑 결혼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두고 보나?

안 돼, 그 놈한테

이런 행복을 넘겨 줄 순 없지.

네 놈이 어떻게 날 괴롭혀,

있을 수 없지.

네 놈이 날 놀려,

있을 수 없지.

복수하려는 소망

이것만이 나에게 

위안 주네. 날 기쁘게 하네.





젊을 때의 힘 있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들려서 처음 들었을 때 어 이거 뭐야ㄷㄷㄷ하고 들었음.


햄슨의 오페라 커리어는 아르농쿠르-포넬이 함께한 모차르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어....사실은 내가 모차르트 오페라를 별로 안 좋아해서 한참을 안 봤음. 처음 본 햄슨 모차르트 작품이 06 잘츠부르크 돈조반니인데...이게 참...음...아니 햄슨이 못 한 건 아니었는데...난 현대적인 연출을 전통적인 연출보다 더 좋아하고, 표현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서 이미지가 쏟아지는 무대도 재미있게 보는 편인데 이건... 그래서 뒤로 미뤄놓고 베르디랑 프랑스 오페라들하고 가곡 약간만 파고 있다가 햄슨이 마스터 클래스에서 모차르트에 대해 열변을 토한-건 아니고 그냥 모차르트는 인간 심리를 포착하고 음악으로 그려내는데 천재적이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모차르트 공부 열심히 하세요! 하는 바람에 그럼 어디 공부해 볼까...하고 챙겨보기 시작했던 것. 내가 전공 교수님 말씀을 이렇게 잘 들어서 공부했으면...


이 영상은 화질도 워낙 별로고 전통적인 흰 가발 쓴 연출이라 햄슨은 푸들같아 보이고 해서 안 보고 미뤄두다가 꽤 늦게 봤는데-    


아마도 이게 내가 들었던 햄슨 목소리 중에 제일 젊은 목소리. 요즘 목소리 예전같지 않다는 평들 볼 때마다 뭐 나이 드는 걸 어떡하라고 잉잉하지만 사실 어릴 때 목소리가 워낙 예쁘긴 함. 리릭 바리톤으로도 특이한 목소리고. 왜 변호사 되겠다는 학생한테 성악 공부 더 할 생각 있으면 연락하라는 선생님이 있었는지 이해가 감ㄷㄷ 음 모차르트구나, 음 피가로의 결혼이구나 하고 지나쳤던 노래에 이렇게 꽂힐 줄이야ㄷㄷㄷ  


오디오만 남아있었어도 고마웠겠지만 영상으로 남아있어서 더 고마운 게 피가로가 빚 갚아서 떳떳하게 수잔나랑 결혼할 수 있게되면 어쩌지? 걱정하다가 에이 어떻게 갚겠어ㅋ하고는 57초에 "내가 조금만 재치를 발휘하면 모든 게 나의 뜻대로 되겠지." 할 때 손가락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척 하는 거, 옆에 비교대상이 없어서 키가 큰 느낌이 잘 안 나는데 193cm되는 사람이 무대에서 저런 나긋하고 귀여운 손짓을 하는 건 규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코피 


1분59초에 "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 여인이 나를 사랑하진 않지만" 할 때는 사랑하는 사람 생각하는 톤으로 부드럽게 바뀌는 거 정말이지 가증스러움ㅋㅋㅋ 결혼한 몸으로 남의 멀쩡한 사랑을 깰 작정을 하고 있는 주제에 사랑을 빼앗긴 피해자 코스는 얼마나 잘 하는지 이런 백작 여린 마음 아프게 한 수잔나랑 피가로가 악역같음ㅋㅋㅋㅋㅋ 햄슨 악역에 대해서 착해 보여서 안 어울린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어떤 맥락인지 이해가 가는 게 나쁜 놈인데 그 순간에 사랑하는 것, 가지고 싶어하는 것, 상처받는 게 전부 진심으로 보임. 스카르피아 할 때도 토스카 굴복시키려고 카바라도시 고문하면서 집무실에 걸어놓은 토스카 등신대 자기 손으로 찢어버리고 숨 몰아 쉬는데 진짜 그런 팬심을 안 받아주는 토스카가 너무한 건 아니지만 스카르피아 저렇게까지 토스카 갖고 싶구나, 한 번 놀고 버릴 거라면서 저렇게 열과 성을 다하다니 이것이 가젤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치타의 교훈인가 싶고ㅋㅋㅋ 그래서 일 트로바토레에서 루나 백작은 도대체 어떻게 불렀나 궁금했던 거. 자기 싫어서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여자 수녀원까지 쫓아가 납치하는 미친 놈을 도대체 어떤 피해자로 만들려고ㅋ  


2분 14초에 "(그런 노예 녀석이랑 결혼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두고 보나?" 되풀이 하면서 고개 살짝 돌리면서 숙이는 거 남자로서 귀족으로서 자존심을 다친 아픔과 분노가 보여서 진짜 저러니까 대혁명이 일어났지 싶은데 오구오구 마음이 그렇게 상해쪄요? 우쭈쭈쭈해주고 싶게 귀엽다. 다시 말하지만 서른 살 밖에 안 됐을 때였다고 으아 귀여워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받은 아픔을 에너지로 바꿔 분노를 터뜨리는 "나 한숨 쉬는 동안 그들 행복하겠지? 나의 꿈은 허사가 되고 그 놈이 그녀를 소유하게 될까?" 되풀이하는 부분은 진짜 정말 좋다 (코피 수습 불가 이 익숙한 멜로디가 이렇게 쓰러질것 같이 좋은 순간이 올 줄이야.


3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안 돼, 그 놈한테 이런 행복을 넘겨 줄 순 없지!" 버럭하는 건 심술과 횡포가 번쩍번쩍한데 여기에 "네 놈이 어떻게 날 괴롭혀!"로 네가 감히? 하는 타고난 듯한 오만함이 더해지는 것도 좋다.


하인이 귀족이자 주인인 나를 괴롭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대혁명 일어났을 때 백작 반응 보고 싶은데 오페라에 안 나와서 안타까울 정도ㅋㅋ 저렇게 높고 맑고 힘차게 부르는 노래 가사가 "복수하려는 소망 이것만이 나에게 위안 주네. 날 기쁘게 하네."라니ㅋㅋㅋㅋ 진짜 뻔뻔하고 자기중심적인 귀족을 보는 빡침이 귀여움을 한껏 불러 일으킴. 내가 알마비바 백작네 하인이면 혁명 일어나자마자 주인 피난시켜주겠다고 속여서 보쌈해다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잘 먹여주고 입혀주고 성질 부리는 거 다 받아주면서 둥기둥기 키울텐데, 가끔 너무 말 안 들으면 바람 쐬러 가서 기요틴 구경도 시켜주고, 에헷      


3분 46초에 손 쫙 뻗으면서 "안 돼, 그 놈한테 이런 행복을 넘겨 줄 순 없지." 마지막으로 되풀이 할때 진짜 심술맞고 못돼먹었는데 왜 이렇게 귀여움?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조악한 화질에서도 선명하고 희게 빛나는 앞니도 진짜ㅋㅋㅋㅋㅋㅋ 손짓이 너무 귀엽고 가증스럽고 예쁘다ㅋㅋㅋ 댓글에 누가 저 시대 손짓 가르쳐 준거 아니냐고 하는데 진짜 배웠나ㅋㅋㅋ 선생님이 스트라우스 오페라에서 귀족 부인으로 유명한 분이셨으니 선생님한테 배웠나ㅋㅋ 마무리도 파워 있으면서도 비단 가지고 노는 것처럼 매끄럽게 오르내리는 소리가 크으 젊음이 좋긴 좋음.


알마비바 백작을 보고 으악 가증스러운데 사랑스럽잖아ㅋㅋㅋㅋㅋ하게 될 줄이야 

아 이런 좋은 공연이 DVD가 없다니 리옹국립오페라 자료실 털러 가고 싶다ㅠㅠ


서른 살은 바리톤으로서는 어리다고 해야 할 나이고 이 때의 햄슨은 뒤셀도르프에서 앙상블로 3년을 지내고 난 뒤 독일과 미국에서 주목을 받고 이제 막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의 프린시펄 리릭바리톤으로 계약을 한 신인이었다. 아르농쿠르의 모차르트에 서기 시작하고 아직 번스타인에게 라 보엠 오디션 보러오라는 말은 듣기 전이었던 젊은이. 이제 막 피어나는ㅋ 젊은 바리톤의 맑고 힘있는 목소리가 보여주는 이 알마비바 백작은 천진하기까지한 악의와 의심없는 특권의식을 마음껏 드러낸다. 무서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는, 세 발짝 앞에 놓인 함정을 전혀 모를 젊은 귀족의 전형.            
      
그리고 27년 후의 햄슨이 부른 알마비바 백작은 이러하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목소리가 변한 게 제일 먼저 느껴진다. 외모는...내가 이분 사진 본 중에 제일 어린 게 열 몇살 때 사진인데 지금 얼굴에서 주름만 빼면 똑같음ㅋ 동창회 나가면 따로 소개 안 해도 누군지 다 알아볼듯. 실제 공연이 아니고 콘서트다 보니 연기는 단순해졌고 더는 옛날의 깜찍한 손짓도 안 하시고 하신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귀엽지는 않을 것 같지만 나는 이 나이든 백작도 좋다. 해석도 근본적인 부분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고 어린 백작처럼 코피가 날 것 같지는 않지만 흠흠 이것도 좋네 끄덕끄덕. 


1985년도의 저 어린 백작은 같은 또래인 혁명 주역들이 왕정 무너뜨릴 시기에 인근에서 제일 먼저 평민들한테 당할 뻔 하다가 운좋게 부인 치마 뒤에 숨어서 아무 것도 없이 간신히 도망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패닉과 분노에 빠져 있을 것 같다면 27년 후의 백작은 조짐 수상할 때 이미 있는 재산 싹 빼돌리고 혁명 후에도 도피 성공해서 잘 살아남아 왕당파 후원해줬을 것 같은 여유로움과 동시에 천한 것들의 버릇 없음에 대한 확고한 분노와 증오가 보인다. 사랑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은 이 백작도 있지만 감히 하인놈이!라는 분노와 모멸이 더 큰 느낌. 거기다 하인놈의 인생 정도야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저 자신만만함도 좋고. 그리고 이 노회함이 사실은 함정에 걸리고 덫에 고꾸라지는 해피 엔딩을 위한 거라는 걸 아니까 더 즐겁다. 85년의 팔랑팔랑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앙증맞고 잔망스러운 백작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 더 사랑스럽고 이렇게 나이 든 백작은 또 저기서부터 참 멀리 열심히 오셨구나, 앞으로도 목관리 잘 하셔서 오래오래 현역으로 계셔주셨으면 이번 호프만 이야기는 정말 좀 아니었지만 가면 무도회는 많이 좋았으니까-하고 흐뭇하게 보게 된다.


가끔 아 진짜 저한테 왜 이러세요 ㅇ<-< 하고 다 놓고 울면서 출구로 뛰어나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이런 변화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살아있는 3D를 파는 재미가 아닐까...ㅋ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