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

녹주공안 본문

묵혀놓은 불씨

녹주공안

neige 2012. 7. 5. 00:58




남정원 저/차혜원 역 | 이산



청 옹정제 시절 광동성 지방관 남정원의 재판기록을 담았다. 절옥귀감류의 판례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인것은 아마도 일본인 번역자의 평역을 우리말로 재번역했기 때문일 것이고 원문자체가 일반적인 판례집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황제의 보우함도, 황족과의 친교도, 높은 의술과 지략을 가진 참모도, 명성이 자자한 강호출신의 절정고수 호위도, 그냥 예쁜 옷 입고 옆에 서 있는게 전부는 아닌 도적출신의 4명의 부관도, 작두 3종세트도, 상방보검도 모두 다 없고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란 장 100대가 전부인 지방관의 고군분투기가 되겠다. 아, 물론 여차할 때 빔을 쏠 수 있는 이마의 초승달도 없다. 



남정원이 처음으로 맡은 퀘스트는 그간 체납된 지방세 징수. 

처음부터 난이도 조절없는 퀘스트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리얼한데 전임자 중에는 이 세금문제때문에 파직당한 지현도 있을만큼 체납이 심각한 동네에서 기근에 곡식값까지 폭등한 상황에서 세금을 걷어야한다. 남정원은 기간내에 선납하면 세금경감같은 정석적인 회유책부터 쓴다. 씁쓸했던 것은 이런 조치에 먼저 세금을 순순히 납부한 쪽은 일반 서민들이고 고액체납자들은 오히려 세금 내는 자들을 바보취급하는 상황. 그래서 상습체납토호들에게는 정중하게 납부 부탁하고 안 내면 감옥에서 명상의 시간 주기, 하루에 일이천매씩 되는 소장을 들고 소송하러 오는 수많은 관련자들 중에 체납자가 있으면 세관원과 먼저 면담이라는 반칙수까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며 세금을 징수하는데에는 성공해가는데 적은 내부에 있었으니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든 만큼 본인들의 일은 늘어나고 부수입은 줄어든 세무담당자들이 파업하겠다고 농성에 들어간다. 황제는 까마득하게 멀고 근방의 최고직인 도대는 지방에서 단물을 쫙쫙 뽑아내던 중이었으니 신임 지현따위 조련하면 금방일 기세. 떠보는 의도가 반 이상인 보고를 들은  남정원은 어, 그래? 성문 닫혔을 시간인데 내가 경비병한테 말해둘테니까 갈 놈은 가라 그래-쿨하게 대꾸한다. 의아해하는 부하들에게 남정원은 침착하게 말한다. 세금은 황제께 가는 것인데 그거 안 걷겠다고 단체행동한 건 뭘까? 반역이지? 반역 토벌하면 난 승진하지? 신난다! 농성하는 놈들 다 사형! 이게 농담같지 않은 것이 남정원이 이름을 드러낸 계기가 대만에서 일어난 비적 토벌. 잘못 덤볐다 싶은 관원들에게 남정원은 관대함을 베풀어 반역자와 아닌 놈 구분을 해야하니까 출첵이나 하자고 한다. 이름 불러서 없는 놈은 농성하러 간 놈이니까 역적. 출석률 100%를 이룬 가운데 남정원은 거기에 각자 실적보고까지 시킨다. 결국은 주모자를 굳이 따지지 않고 이것으로 관원들의 기는 확실하게 잡았던 나름 해피엔딩...인데 이런 파업이 남정원 부임 전에는 먹혔다는 게 슬픈 현실.



이후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당시의 이 지역은 사람이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도적이 들끓고 남소의 폐해가 말을 못하고 거기에 사이비 종교까지 수시로 판을 치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상관들이 탐욕과 꼰대기질을 겸비하고 보스몹으로 버티고 있는 처참한 현실이다. 옹정제때라면 역사적으로는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청나라 황금기로 알고 있는데 지방의 현실을 보고 있으면 군대도 먹을 쌀이 없고 백성도 먹을 쌀이 없고 소 한 마리 값 때문에 시집보낸 딸을 다시 불러다가 다른 집에 또 시집을 보내는가 하면 열 명의 지현이 갈려나갈 동안 세를 굳히고 벼슬까지 산 도둑이 버젓하게 나으리로  대접받는 상황이니 아무리 큰 줄기로 보기에는 태평시대라도 그 윤택함이 말단의 말단까지 모두 고르게 돌아가는 것은 역시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한가 싶어질 지경. 그만큼 그악스럽게 살려고 도둑이 되고 사람도 죽이고...여기도 레 미제라블인가. 



세도가나 관원이 가해자인 사건도 많지만 그렇다고 백성이란 다 선하고 염치를 갖춘 착한 양들은 아니라서 역자의 후기대로 관은 악하고 백성은 선하고 부자는 악하고 빈자는 선하다는 보통의 대립구도를 버리고 읽어야 할 사건들이 많다. 길가다 주운 시체로 멀쩡한 사람을 협박해 돈을 뜯어낸다거나 하는 사례는 그나마 순진한 케이스. 모처럼 고기가 많아진 바다의 조업권을 두고 사사로이 거래하는 폐해가 일어나자 나라에서는 조업허가를 대가로 개인이 돈을 받는 것을 강하게 금한다. 그런데 백성 몇명이 지방 토호가 조업허가금을 억지로 거두려다 실패하자 백성들의 배를 부수고 폭행했다고 고발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전형적인 토호의 패악이고 황명을 어긴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할 중죄다. 그래서 토호를 불러보자 폭행당해서 드러누웠고 백성들을 이미 고소했단다. 뒷목잡고 눕거나 휠체어타고 나오는 수법인가 조사해보니 정말 심하게 얻어맞았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하다. 밀린 소작료를 독촉하러 간 토호를 격분한 농민들이 폭행하고는 도리어 조업권 독점으로 현청과 성에 고발했다는 것.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국법을 어긴 중죄인으로 만들어 죽음으로 몰고가는 솜씨는 보통 농민의 솜씨는 아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송사訟師. 전근대적인 형태의 변호사이자 법무사였던 송사를 왜 그렇게 중앙에서 못 없애서 난리인가 궁금했는데 실제로 송사들이 없는 사건을 만들어내거나 작은 사건을 부풀리거나 심지어는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가면서 사람들에게 수수료를 뜯어내는 사례를 보고나니 저절로 저것은 해로운 새다 손가락질을 하고 싶어지는 심정. 물론 문맹이 대부분이고 관가 문턱이 지금과는 달리 하염없이 높던 시절에 송사의 순기능도 있었겠지만...



남정원 자신이 경중을 판단할 줄 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실제 지방관으로서 이런 조절이 보이는 부분은 흥미롭다. 강직해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는 픽션의 인물들에 비하면 죄인들을 놓치거나 가볍게 처벌할 수 밖에 없다거나하는 현실적인 벽을 부수지는 못하면서도 본인의 능력안에서 가능한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결과를 도모하는 것만으로도 그래도 적어도 이 사람정도만 되어도 희망이 있겠구나 싶은 기분. 



윗선으로 알려 재판을 크게 벌이면 본인의 출세에 도움될 사건들도 그렇게 길게 사건을 끌었을 경우 그 부담이 고스란히 관련된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을 염려해 인사고과를 포기하고 사건을 자기 선에서 마무리하는 경우도 많고 사건의 진실을 밝힌 어린 딸을 행여나 진범인 부모가 해칠까봐 부하를 두어 감시하게 하고 옆집에도 책임을 묻겠다고 감시를 시키는 한편 부모에게는 오히려 딸의 정직함이 너희를 살린 줄 알라고 아이를 아껴주라는 당부까지 거듭하는 세심함도 있다. 



그럼에도 포청천류의 시원함이 없는 이유는 역시나 남정원의 발목을 잡은 것이 부패하고 경직된 관료사회였기 때문. 남정원 자신이 사건을 잘못 조사해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보고를 올렸다가 진범을 밝혀내고 정정보고를 올린 사건이 있는데 마침 남정원을 곱지않게 보고있던 상관은 처음 지목한 사람이 범인이 맞다며 보고서를 다시 올리라며 남정원을 압박한다. 상관의 뜻대로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보고하지 않으면 파직당할 상황에서 남정원은 벼슬을 잃으면 잃었지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버틴다. 세번 네번씩 재심을 한 끝에 성의 순무와 총독에게까지 사건이 올라가고 일이 커지는 중에 진범이 옥사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지만 우겨대는 안찰사나 안찰사의 비위를 맞추라는 주변 사람들이나 암울하기는 마찬가지. 거기다가 안찰사가 범인이라고 우기던 사람은 과연 풀려나서 그간의 고초를 보상 받았는지도 불분명하다; 



남정원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상관의 상관인 도대에게 찍혔는지 녹주공안을 통해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두개의 현의 지현대리를 맡아가면서 열심히 일하면서부터인지 인근현들과 힘을 합쳐 도적들을 소탕하면서부터인지는 안 보이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군량 인수 사건인데 여기에서 보여지는 부패와 횡령에 비하면 사교의 폐해나 송사의 폐해는 귀여울 수준이다. 조직적으로 쌀겨를 매수해 군량을 빼돌려 장사를 하고 군량을 바다에 던질지언정 본인들의 밀수품은 지키는 당당한 부패를 캐들어가다보니 몸통이 다른 사람 아닌 상관의 상관인 도대 어르신, 깃털인 순검 범사화는 은근슬쩍 남정원을 회유하고는 듣지 않자 협박한다. 지현의 수명은 길지도 않지만 자신은 도대가 봐주는 한 언제든지 재기할 것이라고. 그리고 몇달이 지나지 않아 도대가 광주성 안찰사로 승진하자마자 원한을 잊지 않고 남정원을 탄핵, 결국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파직당하고 만다. 



녹주공안의 마지막 사건이 군량인수사건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읽고 욱해서 책을 덮고 쉬었다가 읽었다. 남정원이 현을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융통성과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사람이지만 상관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뻣뻣한 사람이라서 불안불안했는데 결국 이럴줄이야. 결국 남정원이 보령현, 조양현 두 현을 함께 맡아 지현으로 일한 기간은 고작 2년에 불과하다. 문제의 상관이 옹정제에게 파직당하고 나서야 파격적인 인사조치로 광주부 지부로 부임하지만 부임 한달만에 병사하고 만다. 



중국에서 이걸 드라마화 할 생각이 없나 싶을 정도로 사건 자체는 재미있고 당시 중국 지방의 실정을 볼 수 있는 것은 좋은데 그럼에도 읽고나서 마냥 즐겁고 뿌듯하지가 않고 답답한 것은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일거다. 지현에서 파직당하면서 놓아줄 수 밖에 없었던 죄인들과 무엇보다도 어쩐지 오래오래 살아남았을 것 같은 깃털과 그 사이에서 여전히 힘들게 살았어야할 사람들이 책이 끝났어도 여전히 그 땅에 남아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행정에 있어서 개개인의 양심에 큰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라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과오를 최소화하고 감시할 시스템을 구축하는 쪽에 마음이 가는 편인데 이런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오히려 애틋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왜 포청천시리즈가 수백년을 넘도록 인기가 있는지, 작두3종세트와 상방보검이 얼마나 사기템인지도 새삼 느꼈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