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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은 침묵하고 본문

Don Carlo/TH

입술은 침묵하고

neige 2015. 4. 5. 18:27


밖에는 꽃이 피었고 아껴둔 사쿠라모리 잉크를 만년필에 채우는 계절이 돌아왔으니, 사람 죽는 돈 카를로는 좀 미뤄놓고-이제 죽을 사람도 하나밖에 안 남기는 했지만- 좀 행복하고 달달한 거. 

   

어릴 때 호움즈라고 표기가 된-어딘가에 장음 표시가 들어갈 것도 같은데 어디다 넣을지 기억이 안 남-오래된 셜록 홈즈 시리즈를 처음 읽었을 때 4개의 서명의 결말이 불만스러웠다. 아니, 그 많은 보물을 다 잃어버리고 달랑 진주 몇 개 남았는데 안타깝지 않나? 왜 왓슨은 잘됐다고 고맙다며 그제야 고백을 하는 거지? 돈 많은 여자에게 차마 드러내놓고 구혼할 수 없는 퇴역군인 출신 연금생활자의 자존심을 초등학교 저학년이 이해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왓슨의 심리보다는 친구의 행복에 불만을 대놓고 드러내던 홈즈 쪽에 관심이 갔으므로 그 의문은 곧 잊었는데 메리 위도우의 주인공 커플도 그 비슷한 문제로 밀당을 거듭하게 된다.      


유럽의 어느 작은 공국 귀족 도련님과 농부의 딸이 사랑에 빠졌는데 남자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고 여자는 빚 때문에 나이 많은 부자와 결혼을 한다. 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은 여자의 몫이 되었는데 여자의 고국은 워낙 재정이 빈한하고 여자의 유산은 너무 막대해서 여자가 외국인과 결혼해서 재산이 국외로 나가버리면 국가는 파산의 위기에 처할 상황이라 기를 쓰고 여자를 내국인과 맺어줘야 한다 결심을 하고 예전에 헤어진 도련님과 맺어주려고 한다는 게 줄거리. 


헤어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서로 등을 떠밀어주는데 남자는 지금 결혼하자고 나서면 돈 때문에 결혼하려는 걸로 보일까 봐 고백을 못 하고, 여자는 예전에 확실하게 자기를 잡아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남자가 제대로 사랑 표현을 하지 않으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버티는 상황. 그사이 다른 커플의 이야기가 끼어들고 덕분에 오해가 생기고 배경이 1900년대 당시의 파리라서 실존하는 핫플레이스인 카페 막심도 등장하고 캉캉춤 추는 무용수들도 등장하고 우아한 무도회도 등장하고 당시 빈 사람들에게는 과하지 않게 이국적인 동유럽풍의 노래도 등장하는 볼거리 많고 달달한 이야기다. 아래는 올해 초 메트에서 올린 영어 버전 메리 위도우. 우아한 빈의 분위기라기에는 전반적인 색감이 좀 진한 거 아닌가 싶은데 주인공 다닐로가 멋지니까 아무 문제 없음. 







남주 다닐로는 베르디 주인공처럼 운명 탓하면서 땅 파다가 너도나도 구덩이로 끌어들이는 대신 월급루팡 짓이나 하면서 캉캉춤 추는 언니들 구경하러 가고 술 마시러 다니면서 사랑의 아픔을 달래는 중이고, 한 번 이별을 겪고 난 여주 한나는 세상 물정 모르지도 않아서 이렇게 저렇게 다닐로를 떠보고는 일찌감치 다닐로 마음을 눈치채고 끌어당기는 게 귀엽다. 격변의 혁명기를 지나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었던 1900년대 초반, 세계대전을 맞이하기 전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워낙 사랑받는 작품이다 보니 영화로도 이미 여러 번 만들어졌고 공연으로도 여전히 자주 올려지는 작품인데, 1968년 BBC 버전을 추천해서 찾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화질이랑 음질이 많이 안 좋지만, 그라나다 홈즈 시리즈의 그분 맞다ㅋㅋㅋㅋ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노래 부르시는 건 봤지만 여기서 뵐 줄이야ㅠㅠㅠㅠ

얼마나 젊을 때인지 날씬하고 어리신 것 좀 봐ㅠㅠㅠㅠㅠ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다닐로가 술 마시고 놀다가 파티에 늦게 와서 부르는 오 조국이여-로 시작하는 노래. 외교관인 다닐로가 파산 위기에 처한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노래는 아니고 퇴근 이후의 시간마저도 충성을 다하라는 조국 껒ㅗ 나는 클럽에나 가서 놀거임 하는 노래. 사라진 저녁 시간에 괴로워하는 직장인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노래 같지만, 이 사람 6시 칼퇴근도 아니고 무단 조퇴 아무렇지 않게 하는 클럽 죽돌이다. 그렇다고 뇌양현 현령처럼 도시락 까먹을 시간에 밀린 일을 다 해치우는 능력자도 아니라 서류 쌓아놓고 도망 나감. 이런 공무원을 내버려두니 나라 재정이 그모양이지ㅉㅉ 게다가 숙부가 대공이니 아마 낙하산일텐데 ㅂㄷㅂㄷ 하지만 귀여움ㅋ 여기서는 그래도 멀쩡하고 귀엽게 노래를 부르고 나서 숙취 때문에 힘들다고 어디 가서 좀 잘 곳 있냐고 하는데 공연에서도 이 시점의 다닐로들이 이렇게 저렇게 취한 연기를 보여주는 게 귀엽다ㅋㅋ  


중간에 부르는 루루 도도 주주 하는 이름은 막심에서 캉캉춤 추는 언니들 이름으로 이 언니들을 그리제트라고 하는데, 원래는 바느질 일을 하면서 회색의 허름한 옷을 입고 사는 여공을 부르는 말에서 유흥방면의 색채를 띠는 말로 변하게 된 건 이런 아가씨들이 파리로 상경한 대학생이나 예술가들의 애인이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팡틴 역시 이 그리제트에 속하고 그랑테르가 구제불능으로 못생겼다는 판정을 내린 사람이 다른 사람 아닌 여공인 것도 그리제트와 대학생의 연애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 막심의 언니들은 팡틴의 멀고 먼 후배들인 셈인데 막심은 왕족들도 드나들던 곳인 만큼 춤추고 노래하는 여자들이라고는 해도 교양을 갖추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니 팡틴과 비교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눈물이 난다...ㅠ 우리는 그리제트-라는 앙상블들의 캉캉춤과 노래도 메리 위도우에서 유명한 장면. 메트에서 올린 메리위도우는 영어버전이라서 코러스 레이디로 번역이 되었다. 







다닐로는 이 그리제트들을 떼로 몰고 와서 한나와 춤추려는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데 활용하는데, 그렇게 애쓰는 게 귀여워서 한나가 다닐로랑 춤추겠다고 하니까 괜히 버팅기면서 춤추는 권리를 1만 프랑에 팔겠다고 한다. 한나 주변에 몰린 구혼자들을 돈 보고 덤비는 파리 떼 취급해서 쫓아내고 나는 쟤들이랑은 달라-어필해보려고 하지만 정작 빈정 상한 한나는 당신이랑 춤 안 춘다고 밀어내 버림ㅋㅋㅋ 이후로도 이런 다닐로의 삽질과 귀여운 질투와 밀당이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한나가 고백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다 만들어주는데, 그래도 대놓고 고백을 하지 못하고 돌려서 서로 사랑을 말하면서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노래가 입술은 침묵하고.


저 위의 68년 제레미 브렛의 메리 위도우 클립 맨 마지막에도 나오지만, 선율도 가사도 분위기도 달달하기 그지없는 노래라서 콘서트에서 듀엣곡으로 자주 등장한다. 다닐로 역은 원래는 테너였다는데 리릭 바리톤도 맡는 역이라서 다양한 듀엣을 보면서 케미를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음.  

 






2006년 영상. 
카리타 마틸라 진짜 우아하고 아름다우심. 샤틀레 엘리자베타 때도 진짜 여왕님 같다, 빈 아라벨라 때도 진짜 사교계 꽃 같다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아름다우심. 마틸라가 먼저 부르는 한나의 아리아는 빌랴의 노래라고 하는데 아름다운 멜로디와는 달리 가사는 결혼식 전날 죽은 처녀 귀신들이 멀쩡한 남자 홀려 괴롭힌다는 이야기로 동유럽 전설이라는데 몰라 무서워;;; 지젤의 윌리들이 이 빌랴들인가 싶기도 한데, 윌리들은 버림받았다는 당위성 같은 거라도 있지 않았나? 처음 노래 가사만 봤을 때는 다닐로에게 삽질 그만하고 빨리 고백하라고 협박하는 노래인가ㄷㄷㄷ 했는데 동유럽의 색채를 더하기 위한 노래로 줄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아니, 그래도 내가 다닐로였으면 무서웠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이어지는 입술은 침묵하고. 
사랑한다는 말만 하면 될 텐데 마지막까지 그 말을 못 꺼내는 다닐로와 이미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여유만만한 한나의 대비가 좋음. 입술은 침묵을 지키지만, 바이올린의 선율이, 모든 걸음걸음이, 손짓 하나하나가, 심장이 뛰는 소리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인다는 이 간질간질 핑크핑크한 분위기. 이제는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에 다른 접촉 없이 왈츠 스텝이랑 표정만으로도 이런 분위기 낼 수 있는 게 좋고, 마지막 여운까지 다디달아서 좋음. 돈 카를로 보고 나서 이거 보고 다행이다, 남자랑만 케미가 훈훈한 건 아니었구나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ㅋ 아니 그 왜 간혹 남남 케미만 유독 사는 분들이 계시잖음...그럴까봐 걱정했지. 잘 부르고 나서 퇴장 방향을 반대로 잡고 있다가 마틸라가 그쪽 아니고 이쪽이라고 손으로 당겨주니 뒤늦게 그쪽으로 한발 앞서 나가면서 에스코트해주는 건 또 귀엽지 뭔가. 이런 것까지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내가 부끄러우니까 더 유쾌한 변형 버전을 보자.  






2012년 바덴바덴 신년음악회. 앙코르곡이라 이런 분위기ㅋ 

서로 자기 얘기하는 거라는 두 아저씨 사이에서 간택권을 쥔 홀로 예쁜 소프라노는 러시아의 Olga Peretyatko. 영어로 쓴 건 뭐라고 읽어야 할지 애매해서 그런 게 맞음; 햄슨도 비야손도 둘 다 목소리는 겨울은 이분들께는 힘든 계절이겠구나...했는데 신년 음악회에 어울리는 이런 신나는 분위기는 좋았다. 망가질 때 아낌없이 망가지는 비야손 강아지 같아서 귀여움ㅋㅋㅋ 셋이 노래할 때 햄슨이 뒤로 손 뻗어서 비야손 쿡쿡 찔러서 밀어내는 것도 깨알 같고ㅋㅋ 춤추다 놀라는 척하는 것도 귀엽지만, 이거 연습했을 거 생각하니 더 귀엽다. 이 음악회가 훈훈한 데에는 오케 단원들 표정도 한몫했다. 노래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깨알 같은 퍼포먼스에 오케에서 먼저 웃어주고 즐겨주니까 보는 쪽도 즐겁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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